"인위적으로 엔화가치를 떨어뜨리는게 좋다거나 낮춰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일본경제가 처한 상황이 워낙 나쁘다 보니 엔저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엔저가 경제회생으로 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텐 도유(行天 豊雄) 일본 CFO(최고재무책임자)협회 이사장(71) 겸 일본 국제통화연구소 이사장은 인위적인 엔화약세 정책이 일본 경제를 위기의 수렁에서 건져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제 금융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일본의 ''3월 위기설''과 관련, 그는 "은행들의 불량채권 처리가 늦어지고 증시가 비틀거린 데서 생긴 우려"라고 전제한 후 "일본 정부와 금융계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어 최악의 사태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고 못박았다. 일본CFO협회 이사장으로 기업의 재무엘리트 양성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그는 "CFO들이야말로 기업의 미래를 그리는 설계사"라고 역할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2월1일 열리는 한국CFO협회 창립총회를 기념, 도쿄 니혼바시의 국제통화연구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대암 = 양승득 도쿄특파원 ] ----------------------------------------------------------------- -작년 가을 이후 엔화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일본정부가 의도적으로 엔저를 유도한다는 외부 의혹과 반발이 적지 않습니다. "엔저를 지지하거나 기대하는 의견이 일본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소수 이코노미스트와 정치가,그리고 일부 기업들이 엔화 값이 너무 고평가돼 있다고 주장하는 그룹들이죠. 하지만 나는 인위적으로 엔화가치를 낮추자는 의견에 기본적으로 반대합니다. 엔저를 일본 경제의 활력을 되찾아 줄 명약으로 오인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엔저를 유도한다는 지적도 많지만 시오카와 마사주로 재무상이나 구로다 하루히코 재무관이 엔화 값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엔저 주장은 왜 생겨났다고 보십니까. "무엇보다 일본 경제의 현상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은행들은 불량채권에 발목이 잡혀 비틀거리고, 증시는 죽을 쑤고 정부의 재정적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이같은 악재들이 한데 얽혀 있으니 일본 경제의 내일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늘어나고 그 처방을 찾으려다 보니 엔저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된 것이지요" -엔저를 지지하는 그룹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무엇보다 기업들의 대외 경쟁력입니다. 엔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호전되고 가격경쟁력도 높아질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폭이 계속 줄어드는 판에 해외에서 더 많은 외화를 벌어들여 경제를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엔저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둘째는 디플레입니다. 일본 경제는 2년 연속 물가가 떨어지고, 얼어붙은 소비는 풀리지 않는 디플레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엔화 값이 내려가면(환율이 올라가면) 수입물가가 자연 올라가고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디플레 탈출의 발판이 될 수 있다는게 또 다른 이유죠. 마지막으로는 구매력평가를 기준으로 한 주장입니다. 일본의 물가가 원체 다른 나라들보다 높은 상태라 엔화 값도 고평가돼 있다는 이야기죠. 엔저를 지지하는 그룹은 일본의 소비자물가를 감안할 때 현재의 달러당 1백30엔대도 높다고 주장합니다. 1백50엔대까지도 괜찮다는 겁니다" -일본경제와 산업계가 진정 힘을 얻을 수 있는 환율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딱 잘라 어느 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업마다 입장이 다르고 업종마다 상황이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율이 얼마냐 하는 것보다 안정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기업들이 더 원한다는 겁니다. 환율이 자주 급등락하면 기업들은 사업 계획을 제대로 짤 수 없습니다. 내일을 점칠 수 없다는 거지요. 환율 수준이 감당해 내기에 벅차다고 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큰 변화가 없다면 기업들은 여기에 맞춰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 후 엔화가치가 수직상승하다시피 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 시련을 견뎌냈습니다. 90년대 중반의 슈퍼엔고 시절에는 달러당 70엔대 후반까지 간 적도 있지만 철저한 합리화와 구조조정으로 이를 극복한 저력을 갖고 있습니다. 엔화 값이 현재 달러당 1백30엔대에서 움직이고 있는데도 조금 힘들다고 엔화 값을 더 떨어뜨려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교텐 이사장은 금년초 ''금융정책사정''이라는 일본의 한 전문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엔화값이 급락하기 직전만 해도 환율이 약 1년간 1백25엔 전후를 유지해 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엔화환율이 이 수준을 맴돌았을 때 일본의 수출업자는 물론 미국, 아시아 국가들로부터도 아무런 불만과 불평이 없었음을 상기시켰다) -작년말 이후 엔화가치가 부쩍 떨어지면서 한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우려와 위기감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환율전쟁으로 번질 가능성은 없습니까. "없다고 봅니다. 엔저에 대한 반발과 위기의식이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만 중국의 경우 막대한 무역흑자를 누리고 있습니다. 중국보다 훨씬 적기는 해도 한국도 무역흑자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이 예민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환율수준 자체보다 엔화가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닐까요" -이야기를 돌려 보겠습니다. 일본 언론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일본의 ''3월위기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위기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물론 그같은 시각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위기설은 일본 은행들의 불량채권문제와 증시불안 등에서 비롯된 겁니다. 은행들마다 상각처리와 충당금 확충에 적극 나서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량채권을 되도록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 했지만 이제는 솔직히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막대한 규모(지난 2001년 3월말 결산 기준 32조5천억엔)의 불량채권이 일본 금융계의 최대 고민인 것은 분명하지만 은행들도 이제는 더 이상 처리를 미루지 않습니다. 바짝 스피드를 높이고 있는 거지요. 금융위기를 차단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의지도 확고합니다. 위기 조짐이 보이기만 하면 공적자금(15조엔)을 투입해 조기진화에 나설 것이 분명합니다. 4월의 페이 오프(Pay Off, 금융기관 도산시 일본 정부가 보호대상을 예금 1천만엔과 그 이자까지로만 한정한 제도) 동결 해제를 앞두고 금융기관들이 무더기로 쓰러질 것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습니다만 도산은 극소수에 한정될 겁니다. 부실이 누적돼 있거나 경영 상태가 건전치 않은 중.소형 금융기관이 위태로울 뿐 대형 민간은행들은 아무 걱정 없습니다. 체력이 튼튼합니다" -일본CFO협회 이사장도 맡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색다른 분야의 일을 하시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CFO는 단순히 자금이나 관리하고 경리 숫자만 챙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업을 둘러싼 금융환경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 오늘날 CFO의 역할은 기업의 보다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회계제도의 도입과 기업가치를 중시하는 경영기법의 등장, 그리고 국제 금융자본시장의 눈부신 변화 등을 감안할 때 엘리트CFO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CFO협회는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능, 윤리관을 고루 갖춘 인재를 양성해 기업경영과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것이 설립 목적입니다. 2000년 10월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만 기업의 내일을 짊어지고 나갈 엘리트를 길러내는 것이 큰 보람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일본 기업의 파워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는 평이 적지 않습니다. 일본 기업의 강점을 하나만 꼽으신다면 무엇을 들겠습니까. "경영자들의 자질입니다. 변화에 대한 대응과 스피드 등에서 서구 기업들에 뒤진 것이 사실이지만 일본 경영자들 중에는 확고한 윤리의식과 도덕심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사업 목적과 추구해야 할 가치를 올바르게 실천하고 실현해 가는 경영자들이 버텨 주는 한 일본 기업들은 아직 건강하고, 상당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