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새야 새야, 나를 구해다오..권지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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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모닝콜이 울린다.
오랫동안 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의 하나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다.
내가 늘 밤늦게 일을 하는 습관이 있어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야행성이다.
특히나 요즘은 방학중이라 늦게까지 단잠을 즐길 수 있다.
한데 아침 8시가 되면 가차없이 모닝콜이 울린다.
이 모닝콜은 바로 영어학습지에서 '학생관리 서비스'로 한다.
주변의 살벌한 교육분위기 때문에 몇달 전부터 나도 두 아이의 영어교육을 위해 가장 저렴한 방법인 학습지를 신청해온 터였다.
잠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어쩌다 내가 전화를 받으면 상대방 선생님이 퍽 민망해하는 게 느껴진다.
나 또한 민망하다.
그럴 때마다 '게을러 빠진 자질 미달의 어머니'라는 자격지심이 슬그머니 든다.
어미가 그러니 아이들도 몽유병 환자처럼 일어나 선생님의 몇마디 물음에 잠에 취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곤 이내 다시 잠에 떨어져버린다.
평소 아이들 공부에 별 강요도,제재도 하지 않으니 아이들이 계획대로 숙제나 진도를 못 맞춰 학습지 선생님께 실망을 드리는 것 같다.
명색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교사를 8년이나 한 내게,사람들은 "엄마가 그러니 자식들 영어공부야 좀 잘 시킬까"하고 부러워한다.
대부분의 내 또래 엄마들은 아이들 교육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인다.
우스갯소리로 '남편 바람피는 건 용서해도 자식 공부 못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그들이다.
특정 발음이 잘 안된다고 아이에게 혀 수술을 받게 하기도 하고,겨우 우리 말 몇마디 하는 아기들에게도 영어 유치원부터 보낸다고 한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다 귀국하니 웬만한 친구들은 이제 이곳에 없다.아이들 영어공부 뒷바라지하느라 대부분 영어권 나라에 가 있다.
요즘 한국에서 부는 영어 열풍은 꼭 '미친 바람'같다.
나만 무풍지대인양 배짱으로 버텨 보았다.
하지만 광풍을 타고 온 악성 바이러스 때문인지,점점 무기력해지고 허망하기까지 하다.
귀국 초기엔 프랑스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딸아이와,거기서 태어나 유치원을 다닌 아들아이가 너무 안쓰러워 이곳 학교에 아무 말없이 다니는 것만도 신통방통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아이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과 상상력이라고 본다.
외국어 교육도 마찬가지다.
자신감이란,달달 외워 머리에 각인된 문장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와 나 사이의 따뜻한 인간적 감정을 느낌으로써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생기는 것이다.
쉬운말로 상대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마음만 있다면 언어의 소통은 거의 이루어진 것이다.
상상력이란 한 언어로 뿌리내린 사물의 인지능력에서 가지를 뻗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일단은 모국어 교육이 더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년 전,한국에 다니러 와서 몇달 머물렀다 프랑스로 돌아가야 할 네살배기 둘째놈이 안가겠다고 버텼다.
불어를 다 까먹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한데 프랑스로 돌아가서 유치원에 갔던 아이가 집에 돌아와 기쁨에 차서 말했다.
"엄마 또마는 한국말을 다 알아들어!" 단짝 친구인 또마를 만나 불어는 안나오고 그냥 한국말로 했더니 다 통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단순한 것이다.
외국생활에서 느꼈던 점인데,정확한 문장에 대한 강박관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다.
사람 사는 곳의 정이나 의리에 대한 믿음,따뜻한 미소가 정확한 말보다 더 훌륭한 언어이며 또 입을 여는 첫번째 열쇠라는 것이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 '작문'을 보자.
'둘 더하기 둘은 넷/넷 더하기 넷은 여덟/여덟 더하기 여덟은 열여섯…/다시 해봐! 하고 선생님은 말한다.
/둘 더하기 둘은 넷/넷 더하기 넷은 여덟/여덟 더하기 여덟은 열여섯/그러나 보아라 하늘을 지나는/종달새 한 마리/아이는 새를 보고/아이는 새 소리를 듣고/아이는 새를 부른다.
/나를 구해다오/나하고 놀자'
영어 조기교육도 좋다.
하지만 우린 너무 어린 아기들을 기계앵무새로 만드는 건 아닌지.이 시처럼 아이가 가끔은 하늘을 볼 수 있도록,새를 볼 수 있도록,새 소리를 들으며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도록 제발 좀 내버려두면 정말 안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