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드라마] 지하철역 벤치에서 창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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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발이 조금씩 흩날렸다.
서울 지하철 당산역 대합실에서 만난 스물아홉살의 실업자 세사람은 오늘도 갈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 동기인 이들은 벌써 1주일째 이렇게 아침부터 만났지만 매번 어떻게 점심끼니를 해결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어느새 날리던 눈발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창밖을 쳐다보던 김경오가 이렇게 불쑥 소리쳤다.
"야,우리 같이 회사나 하나 차리자"
그러나 이 얘기를 듣던 구자일과 신호인은 공허하게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판에 회사를 차린다는 건 실없는 얘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자공학박사인 구자일이 "그래도 회사를 차리려면 사무실을 얻을 돈이라도 있어야지"라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김경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앉아있는 이 벤치를 사무실로 하면 될거 아냐"
1999년 12월 20일.
이 세사람은 서울 당산역 벤치에서 창업했다.
회사명은 네듀먼트.
김경오가 사장을 맡고 구자일과 신호인이 이사를 맡았다.
이날부터 세사람은 컴퓨터관련 제품을 제조업체에서 떼다 영업점 등에 파는 일을 했다.
이들은 매일 아침 9시 정각에 이 벤치에서 만나 업무회의를 열고 판매아이템을 점검한 뒤 저녁 9시에 다시 만나 당일매출을 집계했다.
이들은 이듬해인 2000년 9월8일 당산역앞 신동방빌딩에 사무실을 차릴 때까지 9개월간 이 벤치로 출근해 눈코 뜰 새 없이 서울시내를 돌아다녔다.
네듀먼트의 김경오 사장(32)은 이게 첫 사업은 아니었다.
그는 건축학과 1학년에 다니던 지난 89년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1평짜리 옷가게를 차려 돈을 벌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안양 인덕원에 현대철물이라는 건재상을 차려 월매출 1억원을 넘기기도 했다.
28세에 다시 의류업을 시작한 그는 의류대리점 4개를 차려 독특한 고가(高價)전략으로 연 4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당당한 기업인이 됐다.
그러나 분당신도시에 7억원을 들여 대리점 2개를 개점하던 날 'IMF'가 터지는 바람에 약 20억원에 이르던 그의 재산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는 눈물을 머금은 채 부인과 딸을 부천 중동에 있는 처갓집으로 보내고 서울역으로 가서 노숙자 신세가 됐다.
서울역에서 2주일을 보내던 그는 서울 강남 술집에서 대리운전을 해주면서 연명했다.
이어 그는 친구들과 당산역에서 만나 또 다시 사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김 사장은 네듀먼트를 창업하자마자 뛰어난 영업력을 발휘해 무인중앙제어시스템을 중국 유망전력유한공사에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어 세계 최초로 지하철 동영상 시스템을 개발,서울 지하철 3호선에 동영상 광고시스템 기술을 납품했다.
곧 스웨덴과 중국 상하이 지하철에도 이를 공급한다.
여의도 삼보컴퓨터빌딩에 있는 자본금 6억3천만원에 종업원 20명의 첨단 제어기술업체인 네듀먼트.
이 회사의 숨은 강점은 지하철 당산역 차가운 벤치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불굴의 의지일 것이다.
(02)6294-5200
r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