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理工系 공부 '이상'과 '현실'..朴星來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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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星來 < 한국외대 과학사 교수 >
올해는 고 한경직(韓景職:1902∼2000) 목사가 탄생한지 1백주년이 되는 해다.
'평생 집 한 칸,예금통장 하나 없이 사신 청빈한 분'이던 그는 '무소유(無所有)'의 종교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 성직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가 화학을 공부하려던 '과학지망생'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일생을 바친 서울의 영락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기념 자료는 잔뜩 있지만,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없다.
이승훈(李昇薰)과 조만식(曺晩植)이 다닌 정주 오산학교에 1916년 입학했던 한경직은 1922년 평양 숭실대학과 1925년 미국 캔자스주의 엠포리아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것 같다.
'우리 민족이 외세에 억눌리게 된 것은 과학이 뒤떨어진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엠포리아대학에서 역사 철학 심리학 공부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민족을 구하기 위해선 과학자보다 목사의 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목표를 바꾼 듯하다.
그 후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나온 한경직은 폐결핵으로 더 이상의 공부를 포기하고 2년간 요양생활하다 귀국,한국의 교회사에 큰 인물이 됐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과학자의 꿈을 키우다 다른 분야로 방향을 돌린 조선 청년들은 많다.
예를 들면 조선인으로 처음 미국에 유학해 대학을 제대로 졸업한 사람은 변수(邊燧:1861∼1891)였는데,그는 1891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도 귀국하지 못한 채 모교에서 연구하다 그해 10월 기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심한 근시였던 그는 다가오는 기차를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메릴랜드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는데,갑신정변 가담자로 조선 왕실의 처벌 대상자였기 때문에 귀국할 수도 없었다.
제2의 미국대학 출신 학사는 서재필(徐載弼:1864∼1951)이다.변수 보다 1년 뒤인 1892년6월 컬럼비아 의과대학(지금의 조지 워싱턴대)을 졸업해 조선인 최초의 양의(洋醫)가 됐다. 변수와 똑같이 갑신정변의 주동자로,미국에서 개업 의사로 일하던 그는 갑오경장 이후 사면을 받아 귀국했지만,과학과는 상관없는 활동을 했다.
1895년 말 그는 미국인 필립 제이슨으로서 귀국했고,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시작해 사회운동에 열성이었지,의사 또는 과학자로 일한 적은 없다.
1900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여자 의학도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해 정식 의사가 됐다.
김점동(金點童:1876∼1910)은 흔히 그녀의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고도 알려져 있는데,한국인 제3의 대학 졸업자다.
남편 박여선(朴汝先:1868∼1899)이 막노동으로 학비를 벌어 주어 공부를 마친 김점동의 비극은 더욱 안타깝다.
남편은 그녀의 졸업 직전 폐결핵으로 미국에서 세상을 떴고,그녀 역시 귀국해 10년 동안 몸을 사리지 않고 병원 일에 매달리다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02년 한경직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조선인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이렇게 3명이다.그밖에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몇 더 있지만,졸업을 하지는 못했다.예를 들면 최초의 영어 통역을 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중국 유학을 거쳐 1888년 말 미국에 갔다.과학과목도 많이 공부한 그는 문과에 집착하느라 시간만 더 보내고도 학위는 얻지 못한 것 같다.
이 초기에 미국 유학했던 몇 안되는 젊은이들은 민족과 국가에 필요하리라는 사명감을 갖고 이과(理科)를 공부했지만,이 땅의 과학기술 발달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그들의 공부는 결국 식민지 조선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 때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과학기술이 크게 발달한 2002년의 한국에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과학자·기술자들은 여전히 그들에게 걸맞은 일자리가 부족하고,문과 출신보다 형편없는 대우를 받는 탓이다.
고등학교 이과반과 대학 이공계의 지원자가 자꾸 줄어든다는 보도가 당연하다.
공부하기가 문과보다 힘든 데다,이과 출신의 자리가 적고 또 낮기 때문이다.
정부에 무슨 대책을 주문하기도 지쳤다.
한국정부란 대대로 문과 출신들의 나눠먹기 잔치니 말이다.
차라리 올 12월29일 '한경직 목사 탄생 1백주년'행사에나 작은 기대를 걸어 본다.
그가 원래 과학자 지망이었다는 사실도 좀 강조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혹시 아는가? 한 목사님의 못다한 꿈을 이루겠다는 젊은이들이 나올지-.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