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의 비상한 관심 속에 방한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예정대로 김대중 대통령과 1시간40분에 걸친 정상회담을 가졌다. 또 도라산역을 돌아보며 남북통일을 기원한 후 2박3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이한했다. 이번 공동기자회견 내용은 대체로 한·미 당국자들이 예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또 부시 대통령의 방한에 앞선 기자회견 등에서 알려진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양국 정상은 동맹관계를 재확인하며 굳건한 공조를 다짐했다. 또 두 정상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문제를 대화로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북한이 대화에 호응해올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그 동안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는 동맹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냉랭한 기류가 감돌았고, 9·11테러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워싱턴에서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미사일,휴전선 무력집중배치 및 인권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데 비해,한국정부는 오로지 민족문제에만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햇볕정책을 외곬으로 밀고 있었고,미국은 9·11테러 이후 새로운 안보개념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국간에 대화는 계속됐지만 동상이몽격이었고,그 와중에서 불신과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이러한 갈등과 긴장은 두 정상의 화려한 미소와 악수,외교적 수사,그리고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 등으로 단번에 가라앉은 것 같다. 과연 비온 뒤의 땅이 굳어진 것처럼,한·미 동맹관계가 굳어진 것일까.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 희망사항일는지 모른다. 특히 우리정부는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에 버금가는 강성발언을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호전적 수사가 없어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다. 더구나 미국이 대화로 북한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다는 발표에 고무돼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도하기에는 이르고 정작 문제해결은 지금부터인 것같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공언하면서도 부정적인 대북관에 변함이 없음을 명백히 했다. 비록 '악의 축' 발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라고 지칭했다. 또 대북 식량지원은 계속하겠다고 하면서도 자유가 박탈된 굶주림의 나라로 북한을 표현했다.즉 완곡한 형태로나마 할 말은 한 것이다. 우리는 이점을 쉽게 간과해선 안된다. 사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해왔으나,미국에 있어 주적은 소련이었을뿐,북한은 그 아류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 북한을 주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거듭해왔다. 그래서 국방백서도 2년에 한번 내기로 했다던가. 하지만 미국은 9·11테러 이후 대량살상무기의 생산과 수출을 계속하고 있는 북한을 대테러전쟁의 주요 표적중 하나로 지목했다. 미국의 핵심적 이익을 위협하고 있는 나라로 치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대북관에 대한 근본적 견해차가 이번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말끔히 해소됐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았으면 하는 기대는 간절하다. 이미 김 대통령은 한·미 동맹관계가 우리 외교의 기본 축임을 천명했고 그 기조위에서 대북정책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물론 우리의 핵심적 이익은 한반도에 평화가 보장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그 테두리내에서 미국과의 접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햇볕정책은 재점검될 필요가 있다. 햇볕정책도 미국과의 공조속에서 추진되지 않는 한 북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우리의 햇볕정책도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탄력적으로 운영돼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햇볕정책을 교조적으로 경직되게 추진했다가는 미국 못지않게 북한으로부터도 불신을 자초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의 핵심은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표현을 자제했다거나 우리의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북한에 대화를 촉구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김 대통령의 평화의지나 북한의 말보다는 오로지 북한의 행동에 의해서만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불신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이 명백해진 것이다.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