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4) '댄디 보이' 시인 박인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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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폐허가 되어버린 명동은 군용 반합을 들고 구걸하는 거지아이들과 구두닦이,실직자,모리배,사기꾼들로 붐볐다.
거기에 변변한 직장 없이 떠도는 수없이 많은 작가와 화가,연극인들이 명동으로 몰려와 한데 어울렸다.
그곳에 오면 약속 없이도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고 재수 좋으면 막걸리라도 한잔 걸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명동은 아직 훈훈한 인정과 친교를 나누는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첨단 유행의 발상지로 사랑을 받던 명동은 1970년대 이후로 증권회사들이 들어서며 신흥 개발도상국가의 새로운 경제활동 무대가 되었다.
일찍이 1940년대에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선구적으로 내다봤듯이 식민지의 애가(哀歌)도 토속의 노래도 사라진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가 되었던 것이다.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 이른 봄.명동 한 모퉁이의 주로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송지영(宋志英),김광주(金光洲),김규동(金奎東)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羅愛心)도 함께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는데,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했다.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 가고,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이진섭(李眞燮)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
한 시간쯤 지나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임만섭(林萬燮)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들었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 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시인은 여름에도 정장을 곧잘 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잡지 사진으로 보고는 그걸 본떠 미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김차영(金次榮)은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 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봄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라고 증언한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은 늘 외상 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 술이야?" "어이구,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