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을 지나 달리니 이따금 가는 눈발이 날린다. 남녘해안과 달리 철원땅에는 아직 겨울이 머물러 있다. 38선휴게소 안의 투박한 무쇠 장작난로가 그렇게 반가울수 없다. '악의 축' '백배 천배 보복'이란 무시무시한 말들이 분단의 아픈 가슴을 더욱 쓰라리게 하는 때. 38선을 지나,민통선 안쪽 남방한계선 가까이서 역사와 현실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6.25 전적지견학에 앞서 토성리의 철원토성을 찾는다. 높이 6m, 위폭 4m의 점토로 쌓은 성의 흔적이 길게 남아 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 마태부 군이 하룻밤새 만든 것이란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던 그들이 이곳에 성을 쌓아야할 이유는 없었을 터. 이 지역 부족국가의 삶터였을 것이란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평가에 귀가 쏠린다. 인근 북방식 고인돌이 그 옛날 토성안의 생활상을 연상시킨다. 도로 때문에 끊긴 토성의 모습이 안쓰럽다. 다리 이름과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전하는 승일교 옆의 새 다리를 건너 철의삼각전적관에 닿는다. '안보관광'의 출발점이다. 전적관 뒷편 고석정계곡으로 내려선다. 신라 진평왕과 고려 충숙왕이 정자를 짓고 즐겼다는 멋진 계곡이다. 꺽지란 물고기로 변해 관원들의 눈을 피했다는 임꺽정의 얘기도 전한다. 오후 1시.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일렬종대로 출발, 먼저 1975년 발견된 제2땅굴에 선다. 분단이, 무모한 욕심이 스스로의 가슴을 후벼파 남긴 커다란 생채기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다음 장소인 철의삼각전망대에서는 북녘땅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안내원이 북쪽지형 모형을 짚어가며 설명을 해준다. 10시 방향의 김일성고지(고암산)는 궁예와 관련이 있다. 금학산이 아니라 고암산을 안산으로 도읍을 정한 탓에 그의 시대가 30년을 넘길수 없었다던가. 화산이 10차례 이상 폭발해 척박했던 바로 그 지점에 도읍을 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전망대 앞 달우물마을(월정리)이란 예쁜이름의 역은 구겨지고 녹슨 열차잔해와 대비돼 한층 쓸쓸해 보인다. 천통리 샘통(천연기념물 245호) 주변의 두루미(천연기념물 202호)와 재두루미(천연기념물 203호) 식구들의 한가한 모습이 부럽다.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제2금융조합 건물의 잔해를 지나 노동당사를 본다. 날씨 만큼이나 을씨년스런 모습니다. 총알자국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하다. 앞 계단에는 북측이 퇴각중 당사를 무너뜨리기 위해 돌진했던 탱그의 궤도자국도 남아 있다. 도피안사로 향한다. 궁예의 생부인 신라 경문왕(또는 헌안왕이라고도 함) 5년 도선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대적광전에 철조비로자나불상(국보 63호)이 모셔져 있다. 도선이 수정산 안양사로 향하던중 화지리 암소고개마루에서 잃었던 불상이 도피안사 터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 암자를 지었다는 것. 불상은 6.25때 또 사라졌고, 1959년 15사단장 이명재장군이 인근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았다고 한다. 정장을 빼입은 중년신사 같은 얼굴모습이다. 최근에 금칠을 한 때문인지 더욱 젊어 보인다.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보물 223호)이 있다. TV드라마 태조왕건이 떠오른다. 고려장수 술희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견훤의 이복 누이동생 대주도금이 이곳에서 스님이 되었다는 애틋한 얘기다. 돌아오는 길가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석이 새삼 눈에 띈다. 철원이 분단의 최일선이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는 기세의 통일전진기지가 될 날은 과연 언제일까. 철원=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