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淸溪川)의 옛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이란 명칭은 한일합병 뒤 일제가 '조선하천령'을 제정한 뒤 상류의 '청풍계천'을 줄여부름으로써 생겼다고 한다. 조선초기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는 '백악 인왕산 목멱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개울물이 합해 동으로 흘러 도성의 복판을 가로질러 중량포로 들어간다'고 적었다. 정조 때 한양의 모습을 담은 '한경지략(漢京識略)' 또한 '우리나라 강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서울의 개천만은 동으로 흘러나가므로 사람들이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개천은 그러나 자연하천이었던 탓에 툭하면 물난리가 났다. 때문에 태종은 재위 12년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 제방을 쌓고 폭을 넓히는 대역사를 실시했다. 황화방(皇華坊:중구 정동)에 있던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을 성밖으로 옮기고 능의 병풍석을 광통교에 사용, 아무나 밟게 만든 것도 그때다. 개천이라는 이름은 이 공사에 의해 비로소 '내(川)가 열렸다(開)'는 뜻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개천은 이후 세종 12년에 재차 정비됐고 영조 36년 다시 대대적인 준설작업을 통해 직선화됐다. 개천엔 광통교 수표교 오간수교 광제교 효경교 태평교 등 24개의 다리가 있었다지만 남아있는 건 거의 없다. 청계천은 1920년대만 해도 가재를 잡을 만큼 깨끗했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화와 함께 생활오수가 늘어난 데다 도로가 복잡해지자 58년 복개가 시작됐다. 61년말 광교에서 오간수다리(평화상가), 66년 오간수다리에서 제2청계교까지 완공됐고 67∼71년 그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됐다.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일부 출마후보자들이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서울 한복판에 물고기와 수초가 어우러진 맑고 깨끗한 '청계천'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곳만 잠시 정체돼도 온통 주차장이 돼 버리는 게 서울의 도로 형편임을 감안하면 과연 얼마나 실천 가능한 계획인 지 궁금하기만 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