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지난 14일 진입,한국으로의 망명을 요구했던 탈북자 25명이 15일 오후 중국을 떠나 필리핀에 도착했다. 이들 탈북자는 공항 내 격리된 구역에서 밤을 보낸 후 16일 대한항공편을 이용,오후 5시20분께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외교부 관계자는 "정부는 당초 탈북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마닐라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무르는 것을 추진했다"면서 "그러나 필리핀 당국이 북한의 입장 등을 고려해 탈북자들이 가급적 빨리 떠나는 게 좋다는 뜻을 전달해와 16일 한국으로 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중국 정부는 지난해 장길수군 가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3국 추방' 형식으로 필리핀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홍영식 기자 woodyhan@hankyung.com 탈북자들의 탈(脫) 중국 길은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진행됐다. 이들이 주중 스페인 대사관을 나선 것은 15일 오후 1시10분(이하 현지시간). 이들이 경비원의 몸을 밀치고 대사관에 진입한 지 불과 27시간여 만이다. 지난해 장길수군 가족이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베이징 사무소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출국한 것과 비교하면 속전속결로 이뤄진 셈이다. ○…탈북자 일행은 이날 외교관 번호판을 단 미니밴 3대에 나눠 타고 대사관을 빠져 나왔다. 그 뒤를 승용차 2대가 따랐다. 차량은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는 대로를 피해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온 후 공항고속도로를 타고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으로 향했다. 스페인 대사관 정문 앞 대로변에 진을 치고 있던 취재진들은 이들이 빠져 나간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공항고속도로에서부터 따라붙기 시작했으나 허사였다. 그들은 베이징 서우두공항에서도 철저한 보안 속에 출국수속을 밟았다.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특별 '노선'을 거쳐 오후 2시45분께 필리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이징 서우두 공항을 떠난 탈북자들은 중국 푸젠성 샤먼 공항을 거쳐 밤 10시께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즉시 공항내 격리된 장소에 마련된 숙소로 이동했으며,취재진의 접근은 철저히 차단됐다. 한편 탈북자들의 서울행 시기를 놓고 우리 정부는 '17일', 필리핀측은 '16일'을 주장해 팽팽히 맞섰으나 필리핀 정부의 입장이 고려돼 16일로 최종 결정됐다. ○…이에 앞서 주룽지(朱鎔基) 중국 국무원 총리는 이날 오전 이들 탈북자 25명의 석방을 시사했다. 주 총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회의 폐막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이들 문제는 법에 따라 처리될 것이며 곧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석방 가능성을 내비쳤다. ○…정부는 탈북자 25명이 무사히 제3국으로 떠난 데 대해 외교 경로를 통해 중국과 스페인 양국 정부에 사의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이태식 차관보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정부는 스페인 중국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측과 교섭을 진행해 왔다"고 밝히고 "본인들의 의사와 인도적 고려,국제 법규 및 관례에 따른 신중한 처리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베이징=한우덕 특파원 홍영식 기자 woodyhan@hankyung.com 탈북자 25명이 필리핀을 거쳐 국내에 입국하면 일단 다른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1주일간 관계당국의 보호아래 건강검진과 탈북 경위 등에 대해 관계기관 합동조사를 받게 된다. 이어 통일부가 운영하는 하나원에 입소,2∼3개월간 한국사회 적응훈련을 받은 뒤 국내 거주지에 정착하게 된다. 이들 탈북자 25명이 받게 될 정착 지원금은 약 4억8천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6월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사무소에 진입했다가 국내로 들어온 장길수군 가족 7명도 이같은 과정을 거쳤다. 중국은 탈북자들이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했던 14일 오후 이미 스페인 대사관측과 탈북자 처리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3국으로 조기 추방'이 결론이었다. 중국이 25명의 탈북자들을 조기 추방한 이유는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거론해온 '세계 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분석된다. 우선 1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유럽연합(EU) 의장단 회의가 열린다. 곧 이어 뉴욕에서는 유엔(UN) 인권위원회가 열리게 돼 있다. 중국은 이 두 회의에서 인권 탄압 국가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탈북자의 북한 송환은 안된다'라는 원칙을 정했다는 게 현지 관측통의 시각이다. 중국이 국제법상 이들 탈북자의 처리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강제 북송은 안된다는 스페인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제3국 추방의 또다른 배경이다. '북한의 무관심'이 조기 추방에 일조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들이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후 북측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었고,현장에 북한 관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등 지난해 장길수 가족 사건때와는 다른 면을 보여줬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