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11:20
수정2006.04.02 11:21
대통령이 결정하는 자리는 공칭 5천개다.
정부 요직과 여당 국회의원,국공영 기업체 임원,관변 단체장으로 줄을 세우면 끝이 안보일 정도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직·간접으로 개입하는 자리까지 합치면 족히 1만은 넘을 것이다.
여기에 차순위 보직까지 합치면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 수에 대한 추정은 적게는 2만에서 많게는 5만까지 불어난다.
자리 수가 늘어날수록 청와대는 바빠지고 인사파일은 쌓여가고 문전이 닳게 되고 참모들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간다.
"지주보다 마름이 무섭다"고도 하지만 인사가 난맥상을 띨수록 권력의 하수인들이 활개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아태재단의 모 인사가 권력기관 인사에 그토록 깊숙이 개입했던 것도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YS 때도 그랬고 이회창 이인제 노무현 중 누가 되더라도 이런 현상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판에 계속해서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리가 걸려 있고 목이 매달린 일이니 시골 농투성이가 아니라면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고 눈도장도 찍어야 한다.
문제는 대통령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의 목록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개혁이 제대로 가동될수록 명단은 짧아지겠지만 현실은 불행히도 거꾸로다.
대표적인 사례가 핵심적인 개혁 이슈로 떠올랐던 사외이사 제도다.
사외이사는 회사 밖의 이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은 놀랍게도 등기이사들이다.
정문 수위들이 차렷 경례를 붙이건 말건 이들이 형식상으론 회사의 주인이다.
주인에게 '사외'라는 말을 붙여놓았으니 '비 오는 맑은 날'처럼 처음부터 모순 투성이다.
금융회사들은 더욱 심각하다.
사외이사만으로 이사회와 행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사외이사는 과연 누가 결정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위성복 조흥은행장은 누가 경질한 것이며 김경림 외환은행장은 누가 교체한 것인지 불명이다.
외환은행은 5명의 이사(전부가 사외이사)중 4명이 행장과 동시에 경질됐지만 누가 그들을 임명하고 해임했는지 오리무중이다.
그저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풍문(?)이 돌면 알아서 물러난다.
"내가 왜 물러나나"하고 버틸 명분도 있을 수 없다.
자신도 바로 그렇게 날아왔던 터다.
정작 이사회가 열리면 천장도 쳐다보고 발끝도 내려다보면서 싱거운 덕담을 주고받고 허허허 웃으면 그만이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니 골치 아픈 일은 눈치껏 비토하면 되고 그래도 월급은 나오니 모두가 행복하다.
결국 몇년의 금융개혁 끝에 책임경영은 실종되고 말았다.
물론 진념 부총리나 이근영 위원장은 거짓말하는 분들이 아니다.
그들이 "은행장 인사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하니 그 말을 믿을 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궁금증은 더하게 되는 것이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는 "정보원들 간에는 눈짓만으로도 무엇을 말하는지 안다"고 했다지만 은행임원 인사에도 은밀한 눈짓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관치시비를 피하려니 더욱 그럴테고.
이렇게 뽑히는 사외이사는 은행만도 1백40여명에 달하고 상장사를 합치면 2천명에 육박한다.
그러니 경영 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 개혁이라는 새로운 명분(?) 덕분에 인간 복덕방들만 대호황이다.
굳이 권력자의 비선이 아니라도 좋다.
요즘은 유력한 고교 동창회들까지 명단을 작성하느라 부산하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의 명단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5천명이라는 말이 나온지도 벌써 몇해가 지났으니 지금은 7,8천명은 족히 넘어서고 있을테다.
소위 언론 개혁이 예정대로 갔더라면 경제부장 자리도 긴 명단의 말석에 올랐을지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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