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7) '시인 김수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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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를 받아 든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다.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북 남원의 집을 떠나 마산의 할머니 집에 와 있던 김주열은 부정 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 3월 15일 밤에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한 달만에 참혹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열일곱 살 소년.이 한 장의 사진이 3.15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하는 이승만 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민심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 마침내 4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4월 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소설가 최인훈,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 있다.
4월 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 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비로소 그의 시 세계는 만개하며 절정을 맞은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빈곤,무지,허위,속물 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 시인으로 남게 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사랑과 평화,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등에서 시간 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공화국!/너는 나의 적이다/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그는 혁명 뒤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의 후진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며 그 절망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