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회장님께서 우리들을 남기시고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신 지도 어언 1년이 지났습니다. 회장님께서 남기신 흔적을 더듬고 그 의미를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회장님은 생전에 몇 권의 회고록을 출간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땅에 태어나서','이 아침에도 설레임을 안고',그리고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입니다. 그런데 그 제목들은 회장님의 생전을 너무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지난 세기 이 땅의 우리 민족이 경험하였던 가난과 절망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어진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매일 아침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어 잠이 일찍 깬다"는 태도로 평생을 하루같이 사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사업을 일구고,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여러가지 일을 성취하는 순간마다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는 각오로 임하였습니다. 고인의 이러한 인생 철학은 평생을 바쳐서 키우셨던 현대그룹의 정신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장님의 인생 철학이야말로 기업 경영을 위한 정신 자세이기에 앞서,우리 민족이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근대화를 이룩하고,절망감에서 벗어나 세계 무대로 발돋움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회장님께서는 한국 경제 근대화의 일선에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일찍이 건설업으로 사업을 일으키면서,한편으로 국가 재건에 큰 역할을 하신 것은 물론입니다. 최초로 해외에 진출하여 한국경제의 도약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앞장섰던 것도 바로 회장님입니다. 이후 회장님은 자동차,조선,중화학공업,전자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고 남들이 백 여년에 걸쳐 이룩한 업적을 짧은 시간 동안에 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장님께서는 우리 경제의 근대화를 향한 여정을 항상 선도하셨습니다. 회장님은 민족 자존심의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이루셨습니다. 과거 수 백년 동안 우리 민족은 남들보다 산업화에 뒤떨어져 세계 역사의 변두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지난 수십년 만에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계 무대의 한 복판으로 나아가 남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슴 뿌듯한 자리에는 항상 회장님의 모습이 같이 있었습니다. 열사의 땅에서 구미의 쟁쟁한 기업과 경쟁하며 외화를 벌어들이던 현장에 회장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동차의 본 고장에 국산 자동차를 처음으로 수출하고 최고 판매량을 기록하던 현장에서도 회장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하던 바덴바덴의 감격적인 장면도 회장님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회장님은 우리 사회 의식의 근대화에도 앞장서셨습니다. 회장님은 스스로를 "재벌이나 부자"가 아니라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 되면서 불가피하게 노사 분규와 같은 계층간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회장님은 항상 근로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회장님의 근면과 성실,그리고 말할 수 없이 소박한 생활을 통하여 이룩하였던 부를 사회 곳곳의 소외된 계층이나 젊은이들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자신의 복지 사업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던 분입니다. 사업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기업인이었지만,이웃에게는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기에 주저하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이러한 회장님의 정신은 의료 사업과 장학 사업을 비롯한 복지 사업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세계 최고의 군사대결지역을 소 떼를 몰고 유유히 넘나든 일은 민족 분단의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업적입니다. 방북 후 돌아오신 소감으로 "여러분,이번 가을에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며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저는 끝으로 회장님이야말로 누구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사랑하고,그들에게서 우리 민족과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싶어하던 인물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국내 최고의 기업 회장이 신입 사원들과 함께 모래판에서 씨름을 즐기던 모습을 우리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당신의 회고록 머리말에서 국졸이 학력의 전부이고 평생 일만 쫓아다니느라 고귀한 철학을 터득하지도 못했지만,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확고한 신념과 최선을 다한 노력을 당부하고 싶어 책을 쓴다고 했습니다. 고인은 생전에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후대들이 공평하게 주어진 자본금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민족과 국가 발전에 더욱 많이 기여하기를 바라던 것이 회장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회장님의 고귀한 뜻을 영원히 간직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유창순(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