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이 올 초 경영목표를 세우던 때의 일이다. 임원들이 작성한 각 사업본부별 경영계획을 살피던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1백% 달성 가능한 목표는 목표가 아니다" 김 행장은 각 사업본부별로 목표이익을 다시 세워 오라고 지침을 내렸다. 임원들은 부랴부랴 목표이익을 상향 조정해서 내놓아야 했다. 한 임원은 "한햇동안 뼈빠지게 노력해도 달성할까 말까한 목표를 새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김 행장은 이처럼 각 사업본부별로 상향 조정한 이익목표를 갖고 담당 임원들과 일일이 계약을 맺었다. 행장과 임원간 경영목표 달성을 위한 이행약정(MOU)을 맺는 곳은 국민은행뿐만이 아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은행의 경영체제를 사업본부제로 바꾸면서 대부분의 시중은행에서 연초마다 벌어지는 연례행사가 됐다. 올 초 외환은행 김경림 행장과 이수신(소매).이연수(기업) 부행장 간에 맺은 MOU 내용은 이렇다. '기업금융본부 이익목표, 상반기 2천7백40억원, 연간 5천5백90억원. 소매금융본부 이익목표, 상반기 2천5백40억원, 연간 5천1백70억원' 두 부행장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서명을 했다. 사업본부제는 은행의 업무를 분야별로 나눠 각 분야마다 책임경영을 확립시키자는 데 취지가 있다. 토의를 통해 결정한다지만 국민은행의 경우에서 보듯 사실상 은행장이 각 본부별 이익목표를 제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목표달성 여부는 그야말로 임원들의 '생사'를 좌우한다. 해당 임원의 성과급 두께를 결정짓는 것은 물론, 연임 여부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은행장이 경영성과가 좋지 않은 임원을 그 자리에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각 사업본부별 이익 극대화를 위한 경쟁이 '살벌하게' 벌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최근 가계대출 확대를 둘러싼 논란의 뒷배경에는 이같은 사업본부제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대출관련부서는 이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대출 확대에 달려들게 마련이다. "가계대출을 적정 수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지만 그쪽 본부장이 말을 들어야지…"(A은행 리스크관리담당 임원)라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개인금융쪽만이 아니다. 기업금융쪽도 각각 목표이익을 달성하기 위한 '자행(自行)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 부실기업 처리가 자꾸 늦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물론 인사 및 예산권을 각 본부장에게 부여해 책임경영을 유도하는 것은 은행경영 개혁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실험단계에 불과하다. 각 본부간 방출인력과 영입인력을 놓고 서로 힘겨루기에 돌입한 때문이다. 실험이라고 하지만 너무 많은 학습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은행권의 현실이다. 김준현 기자 kim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