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가계 살림은 돈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번 돈을 아껴 저축하는 가계가 있는 반면,소득 이상 지출하고자 빚 얻어 쓰는 가계가 있다. 가계 빚,그것을 어찌 볼 것인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은 '차입과 부채에 의존하는 가정 생활에는 자유나 아름다움이 있을 수 없다(인형의 집 1막)'는 말로 경계한다. 셰익스피어(1564∼1616)도 '채무자도 채권자도 되지 마라.빌려주면 돈도 친구도 함께 잃고,빌려쓰면 절약정신이 무디어진다(햄릿 1막 3장)'는 대사는 사뭇 간절한 충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두가지 인종,즉 대출자와 차입자로 구성된다(에리아 수상기)'는 찰스 램(1775∼1834)의 말처럼 동서고금 모든 사회에 금융 현상이 존재해왔다. 기업 부문의 왕성한 투자 의욕이 실현 가능하도록 저축·투자 흐름이 적절하고 원활하게 이뤄져야 국민 경제가 성장하고 민생이 윤택해진다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즉 가계부문과 기업부문이 빚을 주고받아야 경제가 돌아가며 늘어난다. 요즘 대중 매체의 관심이 가계빚 문제에 모아지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은행이 발표한 '2001년 중 가계 신용 동향'의 내용이 단초가 됐다. 가계빚이 작년 총 3백41조7천억원,가구 당 2천3백30만원에 이른다는 기사가 대서특필 보도됐다. 그간 금융기관들의 영업 향방을 탐탁지 않게 여겨오던 정책당국이 손바람을 일으킬 호기를 잡았고,언론들이 덩달아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젠가 가계대출자산 부실증대로 금융기관 자체의 부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단적으로 말해 현재 가계부채가 위험 수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보는 논거는 무엇인가. 첫째,한은이 발표한 가계빚 총액 중에는 농가부채가 포함된다. 농가부채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통적 농촌의 고질적인 생업형 부채이고,다른 하나는 정부정책에 의해 지난 10여년 사이에 급격히 불어난 정책성 농촌부채다. UR대책,농촌구조조정 등 명목으로 역대 정부들이 쏟아부어 빚으로 떠안긴 돈이 얼추 1백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농가부채의 몸체를 감안한다면 가구 당 부채가 과장됐음을 알 수 있다. 둘째,97년 위기 이후 금융구조조정이 상당히 진행됐다. 은행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과 가계부문으로 여신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시장불안 상황하에 여유 자금이 은행으로 몰려 늘어나는 수신 자금을 안전하게 빌려 줄 고객을 찾아 혈안이 된 상황에서도 은행 자금을 얻어 쓰지 못한 기업들은 1차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은행의 기업여신 부족은 투명 경영으로 신용도 높은 중소기업들이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가계신용대출은 주로 봉급수준과 연결돼 있고,주택담보대출은 시가 대비 평균 35% 수준이어서 아직까지는 부실위험이 낮아 보인다. 정책당국의 정신분열증이 도지고 있다. 금융기관의 리스크 관리 철저를 당부하던 입으로 기업여신 확대를 종용하고 있다. 부실징후가 짙은 기업들을 껴안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정부는 신용보증기금 확대 등과 같이 할 일이 제한돼 있다. 셋째,미운 털 박힌 신용카드의 문제다. 그간 길거리 주변에서 카드 전업사들의 회원 모집이 '신용'을 잘 모르는 청소년까지 마구잡이 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문제의 1차 책임은 가입자의 무절제에 있다. 그리고 카드빚은 67조원(총액 대비 19.7%)이므로 늘어나는 가계빚 책임이 몽땅 카드 때문인 듯한 보도와는 다르다. 길거리 회원 모집 금지는 수긍이 가지만,인터넷이나 지점망을 통한 회원모집 정지는 무리한 조치다. 카드사로 하여금 본인확인,신용조사 철저 등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당국의 감독이 머물러야 한다. 획일적 카드 대출 억제는 서민들을 자칫 제도권 밖 사채업자의 가혹한 손아귀에 떨어뜨린다. 빚을 주지도 지지도 않는 것은 개인 경제 생활의 신조로서는 훌륭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를 실행한다면 국민 경제는 침체한다. 미국 건국초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은 "국가 채무는 과도하지 않다면 국민의 축복이 된다"고 했다. 참으로 명언이다. 문제는 '적절한' 수준이 어디냐다. 우리 모두 고심할 문제이다. pjkim@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