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왜 강한가] (7) '체계적 경영진단'..제3자 입장서 점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지난해 어느날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본사 건물.
엘리베이터 바로 옆 안내데스크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분은 출입금지자로 분류돼 있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요원의 차가운 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삼성전자의 협력업체 임원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작년에 납품비리건으로 적발된 업체의 임원들이다.
비리가 적발된 뒤 거래가 끊어져 어떻게든 관계를 복원해 볼 요량으로 찾아온 길이었다.
딱 한번 실수였으니 통사정을 해보자는 희망은 물거품이 된채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다.
삼성전자 안내데스크에는 이처럼 출입금지자 명부가 존재한다.
납품비리건 등으로 거래가 중지된 업체의 주요 임원 수십명이 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
명단에 오르면 영구히 출입이 정지된다.
부정(不正)은 결코 용납하지 않고 그 싹은 사전에 철저히 잘라버리겠다는 의지가 배여 있다.
"부정은 암(癌)이며 전염병이다.부정이 존재하는 한 회사는 결국 망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늘 이렇게 강조한다.
부정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부정에 관한한 삼성은 거의 결벽증세를 보인다.
이병철 선대회장 때부터 그랬다.
삼성하면 '돈,엘리트,부정감사'가 떠오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부정을 적발하는데 철두철미하다.
작년만해도 삼성물산 건설부문,삼성전자 반도체구매부문에서 대규모 부정이 적발됐다.
관련자들은 줄줄이 옷을 벗었다.
처벌은 일벌백계로 다스린다.
국가기관에서조차 감사에 관해선 한 수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조차 나돈다.
감사에 대한 성격이 달라진 건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면서부터다.
요즘은 감사라는 말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경영진단(business consulting)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감사는 이미 발생한 부정을 적발하는 사후적 조치다.
이 회장은 사후적 조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손실을 없앨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된다는 점에서다.
부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지 못하면 불필요한 손실이 생긴다는 뜻이다.
각 계열사와 구조조정본부에 구성된 경영진단팀의 기능은 그래서 옛날 감사팀에 비해 훨씬 광범위해졌다.
부정을 적발하는 것은 기본이다.
더 큰 임무는 부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는 것이다.
부실우려가 있는 회사나 사업부문에 대해 객관적인 관점에서 미리 점검해 부실을 예방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경영진이 놓치기 쉬운 우수인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도 주요 역할의 하나가 됐다.
경영진단에는 열외가 없다.
문제가 있는 곳엔 어디든 청진기를 들이댄다.
경영진단은 이회장의 지시나 경영진단팀의 자체판단 등으로 실시된다.
그렇다고 칼로 베는 일만 하는 건 아니다.
치료방법을 조언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사업부문이 가진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 냉혹할 정도로 샅샅이 파헤친다.
예컨대 TV부문의 경영진단은 국내외 경쟁사 TV와 삼성전자 TV를 몽땅 분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구매부문,물류부문,기술개발능력 등 모든 것이 대상이다.
이를 통해 경쟁력이 어느 정도인지,모자라는 부문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가려낸다.
이를 통해 사업전략이 다시 짜여지고,중장기 비전이 만들어진다.
삼성전자의 해외법인 모두가 흑자를 기록하게 된 것은 지난 97년 해외법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영진단이 시발점이 됐다고 회사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99년 적자사업의 오명을 안았던 디지털가전분야가 작년에 1조원의 순이익을 낸 것도 경영진단의 터널을 통과한 뒤부터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중앙연구소는 장기프로젝트를 담당하고,디지털 반도체등의 사업부문별 연구소에선 단기과제를 연구토록 한 것도 경영진단을 통해 나온 답안이다.
물론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시정하는 것은 각 사업부문장이나 CEO가 할 일이다.
그러나 제3자적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문제가 보인다는 게 구조조정본부 경영진단팀 관계자의 지적이다.
최근 경영진단작업에 들어간 호텔신라가 대표적 예다.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느끼지 못하고,또 치유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경영진단은 팽팽한 긴장감속에서 진행되는 게 일반적이다.
끊임없는 질문과 토론,그리고 확인작업속에서 이뤄진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경영진단을 받는 사람의 속이 편할리가 없다.
그러나 최근에는 경영진단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으려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이 회장이 경영진단팀에 "경영진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우수인력을 발굴하라"는 지침을 내린 뒤 부터다.
"경영진단을 실시하다보면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거나 큰 공헌을 했는데도 업무시스템 문제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원을 발견하게 된다"고 구조조정본부 경영진단팀 관계자는 설명했다.
지난 97년부터 작년까지 1백명 가까운 인력이 경영진단을 통해 발탁됐다.
과장이 부장급 차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경영진단을 받는 직원이 방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성과물을 설명하고 이를 인정받으려 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경영진단팀 관계자는 귀띔했다.
이같은 경영진단기법은 일본의 유명전자업체들이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그룹 구조조정본부 고위관계자는 "경영진단은 일종의 의료행위다.썩은 곳은 도려내지만 왜 상처가 났는지 파악하고 앞으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한 임무다"고 말한다.
부정감사가 아닌 프로세스 개선,책임추궁보다는 대안 마련,단기적 업적보다는 효율 극대화에 경영진단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얘기다.
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