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협상전선] (17) 4년 끈 대우차 매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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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자동차 매각협상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이달 중순까지는 제너럴 모터스(GM)와의 본계약 체결이 가능하다는 소식들이 속속 들어온다.
대우자판은 이번주 안에 GM과 총판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1999년 8월 워크아웃 결정에서 2002년 4월까지 장장 32개월을 달려온 대우차가 이제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워크아웃으로 따지면 32개월이지만 GM과의 자본제휴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우차 협상은 98년 이후 만 4년을 끌어온 터다.
IMF 체제를 완결하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 대우차 매각협상을 이제 정리하고 결산해볼 시점이 됐다.
물론 협상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종점까지 남아 있는 과제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한 두 마디의 '총평식 여운'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협상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다단했고 세계 최상급 인수.합병(M&A) 전문 다국적 기업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기록해 두어야 할 교훈도 많다.
"연내 본계약은 어렵겠습니다. 새로운 비즈니스 케이스(인수모델)를 작성해야겠습니다"
2001년 12월11일 서울 힐튼호텔.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GM의 앨런 페리튼 아시아·태평양 담당 사장의 최후 통첩이 나오고야 말았다.
김석환 대우차 사장과 한대우 산업은행 수석부부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즈니스 케이스를 새로 만들자는 페리튼 사장의 얘기는 원점에서 다시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원점이라니…"
GM과의 배타적 협상 종료시한(2002년 1월20일)을 불과 40여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우리 협상팀의 당혹감은 더욱 컸다.
GM은 대우차 해외법인에서 약 2조원대의 우발채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수대상과 인수가격을 조정해주고 우발채무에 대한 채권단의 전면적인 사후 보증(Indemnity:인뎀너티)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GM이 해외에서 포착했다는 우발채무는 현지 법인의 이전가격 조작 가능성 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우발(생길 수도 있는) 조세 채무' 1조5천억원, 재고자산과 유동자산의 평가액 차이 5천억원 등이었다.
인뎀너티라는 조건도 가혹한 것이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언젠가 생길 수도 있는' 모든 우발채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가격협상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찍이 제일은행이 그 덫에 걸렸고 현대투신이나 한보철강 매각협상도 늘상 이 문제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국제 M&A 협상에서 인뎀너티 조항이 빠지는 딜은 없다.
특히 GM처럼 전 세계에서 수도 없는 M&A를 해왔던 기업이라면 이 부분을 놓칠 리가 없다.
문제는 우발채무의 범위와 보증방식이었다.
GM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았다.
12월21일 실무 협상이 재개됐지만 GM의 주장은 똑같았다.
그 사이에 GM은 12월18일 릭 왜고너 사장 주재로 집행이사회를 열고 "우발채무문제가 해소되지 않으면 본계약을 타결짓지 말라"는 훈령을 한국 협상팀에 내려놓았다.
우리 협상팀은 당장 GM측의 주장을 확인할 길이 없어 애를 태웠다.
우발채무를 발견했다는 GM의 회계자문사 딜로이트 투시(Delloitte Touche)에 세부내역과 계산근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했지만 GM측은 자료 공개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주요 해외법인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확인작업을 벌였지만 그런 식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었다.
해가 바뀌어 1월3일 우리 협상팀과 마주한 GM은 기어코 새로운 비즈니스 케이스 작성을 선언했다.
그동안의 실사를 바탕으로 한 달 뒤 새로운 인수조건을 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협상팀은 우발채무 문제가 회계법인들간 중재를 통해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즉 딜로이트 투시와 삼일회계법인이 협의를 벌이면 기존 양해각서의 골격을 흔들지 않고도 본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매각을 지휘하고 있는 수뇌부들도 이같은 낙관론을 숨기지 않았다.
"대우차 해외법인 문제는 양측 회계법인들이 실사결과를 토대로 협의하고 있으며 계약구조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변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2001년 12월26일, 정건용 산업은행 총재)
"노사간 임단협 개정과 우발채무 문제만 제외하면 기본적인 협상은 거의 타결됐다.
빠른 시일내에 본계약이 타결될 것으로 본다"(2002년 1월3일, 이근영 금감위원장)
그러나 2월6일 산업은행에 도착한 GM의 수정 제안은 이같은 기대와 낙관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GM은 양해각서를 체결할 때만 하더라도 모두 인수키로 했던 24개 해외법인 중 9개 법인만 인수하고 대우차 자산인수 대금도 기존 12억달러에서 8억5천만달러로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GM 주장대로라면 양해각서의 틀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형태의 매각 모델을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GM과의 협상은 항상 그랬지만 채권단은 이번에도 혹독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대우차를 매각?것이냐, 아니면 판을 깰 것이냐.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