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를 향한 비상과 거듭된 좌절 사이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시 세계는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1968년 4월 13일,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 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이 딜레탕트야" 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 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 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김수영은 '퍽!' 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진다. 밤 11시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김수영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 의식을 시 속에 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해방 이듬해에 시작 활동에 뛰어들어 1950년대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 '후반기' 동인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을 발견하고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심화시켰다. 이어 4월 혁명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아직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현실과 그의 의식은 첨예하게 부딪친다. 이 때 시인 김수영의 비판적 감수성이 절정의 시편들을 토해낸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 시인이며 4월 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는 문학 속에 하찮은 '일상성'을 수용하고,삶이 문학이며 문학이 곧 삶임을 일깨운다. 거칠고 힘찬 남성적 어조의 시 속에 담아 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 폭로,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빈정거림,맹렬한 비판은 오랫동안 여성적 정조의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 시에 대한 반동이며 갱신의 뜨거운 몸짓이다. 그는 정신의 깊이와 정직한 자기 성찰,예술가의 순결한 양심과 완전하게 밀착된 시를 쓰려고 했으며,이것이 곧 시인에게 부과된 행동과 실천의 길임을 믿은 사람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곧 언어와 자기자신,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그의 시집이 3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