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협상전선] (18) 4년 끈 대우車 매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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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가을쯤으로 사람들은 기억한다.
벽안의 젊은 외국인 한 사람이 인천 부평공장에 들어왔다.
불과 32세의 나이에 새한자동차(1983년 대우자동차로 사명 변경)의 구매담당 이사로 파견된 GM코리아의 해외사업부 부사장보 앨런 페리튼이었다.
그가 부평공장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제너럴모터스(GM)가 1972년 신진자동차와 50 대 50으로 설립한 합작사의 신진측 지분을 1978년 대우그룹이 인수하면서다.
당시 페리튼 이사의 업무 파트너는 김태구 전 대우차 사장(당시 이사).
그때까지만 해도 훗날 이 젊은 외국인이 한국 최대 M&A의 협상전선을 주무르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페리튼 아시아.태평양지역 신규사업본부장은 GM 입사 이후 30여년 동안 미국 일본 한국 등을 부지런히 오가며 GM 아시아 전략의 충실한 집행자 역할을 해냈다.
일본의 이스즈, 스즈키가 그의 손을 통해 GM 휘하로 결집했고 대우차 인수작업에서도 플레이 메이커는 항상 그였다.
1997년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대우차 지분을 GM에 매각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찾은 사람도 페리튼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김우중 전 회장같은 인물을 제외하면 페리튼만큼 대우차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대우차 직원들의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니다.
페리튼은 세계 자동차업계 전문가중 단연 한국통이다.
GM그룹 내부에서는 1백위 명단에 들어가는 상위 서열이다.
대우차가 이런 인물을 상대로 협상을 벌이게 된 상황 자체가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협상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상대를 잘 안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와 전략의 불균형을 의미했다.
GM은 지난 2000년 6월 대우차 국제입찰에서 탈락하고도 인수팀 전원을 본사로 철수시키지 않았다.
5∼6명의 실무자들은 여전히 서울에 남아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당시 포드는 인수대금으로 70억달러를 내세워 대우차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정부와 채권단은 포드로의 매각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실사가 끝나고 난 뒤 인수가격을 과연 얼마나 깎아줄 것이냐 정도가 관심사였다.
정부 고위 인사들 역시 앞다투어 포드의 제안내용을 언론에 흘리며 때이른 공치사를 늘어 놓을 정도였다.
GM 수뇌부는 포드의 실사가 한창 진행되던 8월에 디트로이트발 외신으로 "포드가 대우차를 인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며 GM에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이를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포드가 제시한 70억달러라는 인수금액만이 신문에 커다랗게 부각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2000년 9월15일 포드의 인수 포기 발표가 나오자 GM은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인수팀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대우차 매각사무국이 GM측과 다시 접촉하게 된 때는 그로부터 불과 닷새 만인 9월20일.
장소는 서울 힐튼호텔.
이 자리에 나타난 페리튼 본부장은 "인수를 전제로 만난 것은 아니다. 그저 관심이 있는 정도"라고 연막을 쳤다.
이 때부터 그의 노련한 협상술이 구사되기 시작했다.
능란한 밀고 당기기와 미국 본사를 통한 '외곽 때리기', 한국내에 잘 짜여진 인맥들을 활용한 '선전술'에 이르기까지 페리튼 본부장의 활약은 종횡무진 그 자체였다.
GM이 협상팀을 계속 남겨둔 배경에는 페리튼 본부장의 탁월한 예감이 작용했다.
페리튼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GM 네트워크를 통해 포드의 실사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데다 대우차 내부 사정에도 밝았기 때문에 포드의 인수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는 GM의 기대는 현실화됐다.
뿐만 아니라 같은해 6월에 치러졌던 국제입찰 때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했다.
'한국 전문가' 페리튼 본부장의 솜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포드가 빠져 나가면서 주가폭락 등 총체적인 경제위기감이 고조되던 2000년 가을부터였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