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9) '소설가 김유정' <上>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1930년 8월 말.스물 두 살의 청년은 늑막염이었다.
청년은 유산을 틀어쥐고 앉아 있는 고향의 형에게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그때 청년은 둘째 누나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서 술과 난봉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의 동생이 보낸 구조 신청을 외면했다.
겨우 몇 푼 보내주는 시늉을 하고서는 입을 씻은 것이다.
이 청년이 바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년)이다.
김유정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수필 12편,편지·일기 6편,번역 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백60편에 이르는데,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신춘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됨으로써 문학 지망생들의 부러움을 사며 문단에 나온다.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떡''만무방''봄 봄' 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를 한 게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 잡기로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휘문고보 시절,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라고 자랑을 했다.
휘문고보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 편지를 보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유정이 기거하던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박녹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녹주가 가정부를 시켜 김유정을 불렀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쩌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쩌려고가 무슨 말이오.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훤칠한 키에 잘생긴 김유정은 스스럼없이 응수했다.
그는 사랑한 뒤에 어쩔 생각이냐는 박녹주의 물음에 "결혼하는 겁니다" 하고 대꾸한다.
박녹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박녹주의 집에서 물러나온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고,노골적인 협박과 호소가 범벅이 된 편지를 다시 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혈서로 된 이런 편지를 받고 박녹주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녹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혈서도,애원도,협박도 효과가 없어 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밟히고 만다.
김유정은 노동자를 상대로 싸구려 밥장사를 하는 둘째 누님 집에 얹혀 살았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안회남이 찾아오면 장기를 두고 속이 출출하면 누님이 웃묵에다 차려놓고 간 밥상을 잡아당겨 둘이 함께 먹었다.
그때 이미 김유정의 병은 깊어갔다.
유정은 집에서는 둘째 누님의 학대와 수모를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광업소에 나간다고 속이고 기둥서방 노릇 하는 정씨는 누님에게 걸핏하면 손을 댔다.
누님은 그 화풀이를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유정에게 했던 것이다.
"너 취직이라도 좀 해라.네 누나가 고생하는 게 네 눈엔 안뵈니" 유정은 누님도 밥장사를 하느라 심신이 고달팠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구박을 견뎌냈다.
연애도 실패하고 사업도 실패했다.
인생살이가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편의 소설을 써냈지만 그것으론 약값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암담했다.
유정은 폐지 위에 '운명!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라는 글 따위를 끄적이며 탄식을 했다.
그는 혜화동의 누님 집을 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운명이 치질과 폐병을 안고 있는 그의 몸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는 더욱 소설에만 매달렸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유정은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유정은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님이 그를 만류했다.
그는 일본행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