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모터스(GM)는 1997년 이후 한국 자동차업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때 '한국으로부터 두 번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번째 '배신'은 1997년 말 거의 손아귀에 넣었던 쌍용자동차를 불과 한 달 만에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에게 '빼앗겼을 때'였고 두 번째는 1999년 말 한국 정부와 진행해 오던 대우자동차 인수 수의계약이 국제입찰로 전환됐을 때라고 한다. GM은 1997년 여름부터 3조5천억원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 위기에 직면한 쌍용차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1992년 대우차와 결별한 뒤 아시아권 국가로의 수출 확대를 위해서는 한국시장 재진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한국에서 쌍용차를 제외하고는 마땅한 제휴선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와 제휴를 맺고 있었고 대우차와는 결별 이후 감정이 좋지 않았다. 기아차는 부도유예협약 적용이 시작돼 처리 일정이 극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앨런 페리튼 GM 본부장과 김석준 쌍용 회장측은 수차례 협상을 거쳐 인수 조건을 조율해나갔다. 그러다가 1997년 12월 대우 김 회장과 쌍용 김 회장의 전격적인 인수.합병 발표가 나오자 GM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GM은 그해 11월 들어 대우가 쌍용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대우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해치울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GM은 일련의 흐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그 진원지로 김 회장의 대(對)정부 로비력을 지목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쌍용차의 처리문제는 주거래은행인 조흥은행의 재가가 필요했고 조흥은행은 당시 재정경제원과 은행감독원의 직할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GM이 당했다는 두 번째 '배신'은 대우차 매각절차를 국제입찰로 전환한 것이다. GM은 1999년 8월 대우차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자 그해 12월6일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12월13일 청와대 금융감독위원회 산업은행 등에 인수제안서를 제출했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은 "대우차를 뉴욕 소더비 경매식으로 매각해서는 안된다. 금융시장 안정과 한국경제의 신인도 향상을 위해 해외에 조기 매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GM과의 수의계약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12월 말 포드가 돌연 인수의사를 표명하면서 대우차 매각절차는 국제입찰로 바뀌게 된다. GM은 국제입찰이 대우차의 가치를 더욱 떨어뜨릴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은인자중하던 현대차까지 입찰 참여 가능성을 흘리고 나오자 흐름을 돌려 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배신감' 탓이었는지 GM은 2000년 9월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 직후 채권단과 만나 배타적 협상권을 요구하게 된다. 왜 배타적 협상권을 요구했느냐.GM은 기본적으로 한국 정부나 채권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금은 한국 정부가 우리와 협상을 벌이지만 결국 현대차에 대우차를 맡기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이 문제는 또 대우차 처리의 양대 주체였던 오호근 대우계열 구조조정협의회 의장과 엄낙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의 마찰로 비화됐다. 오 의장이 GM측 입장을 수용하기로 하고 산업은행에 이를 통보하자 엄 총재가 거부한 것. 엄 총재는 "섣불리 배타적 협상권을 줬다가 포드와 같은 꼴이 되면 나중에 누가 책임지느냐"고 오 의장측을 힐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10월3일 체결된 비공개 양해각서에는 GM의 배타적 협상권을 우회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이 담기게 된다. GM의 '의심'을 어떤 형태로든 풀어주지 않고는 협상을 한 발짝도 진전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