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내리는 '파벌보스 구조' ] 요즘 일본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없이 "돈줄이 말랐다"고 아우성이다. 장기불황 속에 놓여 기업에 선뜻 손을 벌리지 못하는 데다 파벌보스가 주는 '떡값'도 예전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자금이 과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자민당의 모리파에 속해 있는 야마모토 의원(재선)은 "보스로부터 1년에 두 차례 3백만엔(우리돈 약 3천만원)씩 받지만 옛날에 비하면 굉장히 줄었다"고 말했다. 금권정치의 본산인 일본 정계도 변화하지 않고는 안 될 처지에 놓였다. 그 변화의 핵심에 파벌보스의 쇠락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가토 이치로, 스즈키 무네오 등 자민당 보스급 의원들의 잇단 낙마는 이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들이다. "의원들에게 돈을 뿌려 '나를 따르라'던 시대는 막을 내렸음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고노 타로 자민당 중의원의 평가다. 최근 들어 '무파벌주의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변화가 낳은 산물이다. 히라사와 의원은 "보스로부터 용돈은 못 받겠지만 구속이 싫어 파벌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금권정치의 진앙지인 파벌정치가 이처럼 뿌리째 흔들리는 이유가 뭘까. 지난 93년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정계는 자민당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리쿠르트 사건(88년), 사가와큐빈 사건(92년) 등 파벌보스들이 연루된 잇따른 뇌물스캔들 앞에선 철옹성 같던 자민당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지난 93년 총선에서 참패, 38년간의 1당 독주체제를 접어야 했다. 이어 집권한 호소카와 연립정권은 '자민당내 파벌해체'를 숙원사업으로 설정했다. '정치자금규정법'과 '소선거구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양날의 칼. 정치자금규정법은 기업 등 단체가 개별 정치인에게 직접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주요 골자다. 5년의 경과기간을 거쳐 지난 2000년부터 시행됐다. 일본 총무성이 지난해 9월 발표한 '2000년 정치자금수지보고서'에 따르면 후원금 규모 20걸에 속하는 보스급 의원중 12명의 수입이 줄었다. '소선거구제' 역시 파벌보스에겐 치명타였다. 과거 2∼5명을 뽑는 중선거구제 아래에서는 파벌마다 후보를 내 이들의 당선을 위해 보스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왔다. 그러나 파벌에 관계없이 당에서 1명의 후보만 내는 소선거구제 하에선 파벌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파벌정치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고노 의원은 "파벌이 없어지는 과정이 정치개혁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됐지만 파벌은 없어지지 않았다"(오카다 가쓰야.민주당 4선의원)는 엇갈린 반응도 없지 않다. 어쨌든 정치3류국 일본에도 정치자금의 글로벌스탠더드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도쿄=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