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는 상형화된 문자를 제외하고 가장 폭넓은 상징성을 가지는 '제2의 언어'입니다. 사람들이 불조심 표지판의 빨간색만 보고도 위험을 느끼는 게 그 한 예죠. 컬러리스트는 색채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합니다." '문은배 색채디자인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문은배 소장(40)은 최근 전문직종으로 각광받고 있는 컬러리스트의 업무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품의 형태나 기능 분야에서 각국간 기술 차이가 점점 줄어들면서 기업들이 그동안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던 제품의 색채분야에서 차별화를 두려는 전략을 짜고 있습니다. 이에 비춰볼 때 컬러리스트들의 향후 진출분야는 더욱 넓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정부의 지원 아래 한 세기 가깝도록 체계적인 색채연구를 진행해온 선진국의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색채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불과 10여년 전부터다. 컬러리스트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가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 상품가치를 극대화하는 것. 또 하나는 색의 기본틀을 정해줘 색채 작업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색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체계를 부여하는 일이다. "빨간색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국제규격에는 3천여개가 넘는 빨간색군이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색좌표를 살펴보면 각각의 색마다 나름대로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국경의 개념이 희미해지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러한 색채정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게 문 소장의 설명이다. "중소기업의 경우 외국 바이어가 요구한 색채를 맞추지 못해 수출상품에 클레임이 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과학적인 색좌표에 기초한 생산이 아닌,생산자 개인의 '눈대중'에 따라 색을 결정하는 데서 기인하는 문제입니다." 뛰어난 컬러리스트가 갖춰야할 조건은 무엇일까. "일반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훌륭한 컬러리스트입니다. '슬프다' '기쁘다'의 느낌을 색으로 표현했을 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감성을 과학화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거죠."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문 소장은 졸업후 광고디자인과 웹디자인 일을 하다가 색채디자인 업무에 관심을 갖게 됐다. KBS색채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한국전력으로부터 송전 철탑을 주위 환경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부터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 체계적인 색채 관련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제 스스로 이 분야를 개척한다는 느낌으로 일했습니다. 1년여동안 철탑이 세워질 곳 부근의 나뭇잎 색깔까지 조사하면서 그 일에만 매달렸죠." '감성을 디자인하는 색채전도사'(서울대 디자인학부 권영걸 교수)라는 주위의 평을 얻는 것도 이러한 노력 덕분이다.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방안 중에 색채는 비용이나 효과적인 면에서 가장 좋은 수단입니다.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최상의 고부가가치 소프트웨어인 셈입니다." 색채는 단순한 장식이나 마무리 요소가 아닌,기능적인 산업도구라는 게 문 소장의 확고한 철학이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