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마을 완도의 섬소년이 세계 최고의 골퍼 'KJ CHOI'가 되었다. 컴팩클래식 최종일 경기가 중계된 6일 새벽,많은 국민들이 숨을 죽이며 TV를 지켜봤다. 경기가 끝났을때 고국팬들은 한국인 최초의 미PGA투어 우승에 감격해했다. 지난 70년 전남 완도의 넉넉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최경주. 완도수산고 1학년때인 88년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골프에 입문한 뒤 14년만에 세계 최고의 무대인 미PGA투어 정상에 오르기까지 그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 최경주는 골프입문 후 5년만인 지난 93년 프로테스트를 통과했다. 박노석 유재철 등이 그의 동기다. 프로가 되기까지 서울.인천 등지의 연습장을 전전했지만 프로데뷔 만큼은 화려했다. 그 어렵다는 프로테스트를 단 한번에 합격했다. 축구와 역도로 단련한 체력과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집념이 그 밑바탕이었다. 프로데뷔 후 국내에서 8승을 거둔 최경주는 99년 일본으로 건너가 2승을 올린다. '될성부른 떡잎'은 한국과 일본에서 개화됐고, 동시에 그의 눈은 미국으로 향했다. ◆ 좌절과 행운의 연속 : "내 자신의 성취보다 한국골프의 선구자가 되겠다." 최경주가 99년9월 미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하면서 한 말이다. 자신이 희생양이 되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지옥의 관문'이라는 그 테스트를 꼴찌(공동 35위)로 통과했다. 2000년엔 상금랭킹 1백34위로 시드권을 잃고 말았다. 또다시 Q스쿨행. 최경주는 이번에도 31위로 간신히 시드를 받았다. ◆ 우승 뒤에는 눈물과 노력이 : 새카만 피부, 찡그린 표정. 단어 나열수준의 '콩글리시'. 최경주의 미국생활 초반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워낙 먹성이 좋아 음식은 가리지 않았지만 언어나 문화, 유색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은 차별은 그에게 투어이상의 장벽이었다. 그러나 최경주는 이겨냈다. 그 뒤에는 아내 김현정씨의 헌신적인 내조가 있었다. 아내의 권유로 독실한 크리스찬이 되어 기도했다. '미국진출 후 10년동안 투어카드를 놓치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볼을 치고 또치고…. 그야말로 연습벌레가 됐다. 세상이치는 간단했다. 노력하는 자에겐 길이 있었다. 라커룸에서 타이거 우즈를 만나도 우즈쪽에서 먼저 '헬로!'를 외쳐왔다. ◆ 이제 또다른 세계로 : 미국진출 3년만의 우승. 자신이 생각해도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성취다. 그러나 1승에 만족하지 않는다. "밟아보지 못한 또다른 세계에 도전하겠다"는 것이 그의 말. 돈과 명예. 한국골프의 활성화와 후배들에 대한 기여. 얼핏 목표의 반쯤 달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다음번 목표는 메이저대회 우승 또는 타이거 우즈와의 우승다툼이 될 것이다. 김경수 기자 ksm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