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3) '청마 유치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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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청마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 통영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詩作)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지용,이상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었다.
다방에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고 유치원에 있는 아내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유치원 보모이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청마의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가 나온 것은 1939년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창문사에서 찍어냈는데,시집 표지에는 청색지사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혀 있다.
시집의 제호는 김소운의 의견을 따른 것이고,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했다.
청마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난 것은 1940년 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때여서 너나 할 것 없이 궁핍했던 시절이다.
하얼빈에서도 마차로 하룻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연수현이라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그 소도시의 네거리에는 효수당한 비적(匪賊)의 머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 걸려 있었는지 말라서 소년의 얼굴처럼 작고 검푸르렀다.
흑룡강에서부터 불어온 황량한 바람이 그 비적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곳에 가형인 동랑 유치진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다.
자금 융통이 필요했던 청마는 이듬해 귀국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베일 듯 추웠고,대기를 부옇게 지우며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청마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를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의 광막한 벌판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였다.
청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는데,그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었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달 뒤에 해방이 되었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