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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협상전선] (26) 꼬여가는 하이닉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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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18일 오후 8시.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드디어 이륙준비를 시작했다. 커튼으로 가려져 일반 승객들은 볼 수 없는 1등석 한 켠엔 영국신사풍으로 차려 입은 이덕훈 한빛은행장이 앉아 있었다. 이 행장은 '휴'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자들을 모조리 따돌리고 '무사히' 탑승하긴 했지만 앞으로 닥쳐올 운명적인 사건들, 어쩌면 현대 한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를 일들을 생각할 때 심경이 여간 복잡한게 아니었다. 지난 이틀간은 참으로 힘든 강행군이었다. 정확히 16일 저녁부터였다. 금융감독위원회 최고위급 간부가 갑자기 하이닉스반도체 채권은행의 고위 관계자들을 호출했다. 추상같은 '지시'가 떨어졌다.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하이닉스 딜(deal)에서 철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이크론이 보내온 양해각서(MOU) 초안에 토달지 말고 그냥 서명하세요." 딴 소리를 내뱉는 즉시 자리를 내놔야 할 것 같은 준엄한 분위기였다. 17일 오전 채권단 운영위원회가 긴급 소집됐다. 이 행장에게 MOU 체결의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 유일한 안건이었다. 조흥투신운용, 씨티은행, 서울투신운용 등 평소 '삐딱한' 자세를 보이던 곳들이 예상대로 즉각 반발했다. "구속력 있는 문서에 덜컥 서명을 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회의 분위기는 부결쪽으로 기울어져갔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하루 밤이 지난 뒤 상황이 반전됐다. 채권단은 '사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이 행장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미국 현지시간 18일 저녁. 이 행장을 태운 여객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이 모습을 드러냈고 실무그룹으로 보이는 몇명이 뒤를 따랐다. 시간이 문제였다. 스티브 애플턴 마이크론 사장의 일정 때문에 모든 일을 19일 오전 중에 마무리해야 했다. 숙소는 팔로알토 외곽에 위치한 스탠퍼드파크 호텔.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협상장으로 달려갔다. 어차피 마이크론측 협상안을 모두 들어주기로 한 만큼 얼굴을 붉히며 싸울 일도 없었다. 마이크론이 만들어놓은 MOU 초안에 공란으로 처리돼 있던 것들에 대한 논의가 대부분이었다. 19일 점심 무렵, MOU가 공식 체결됐다. 각서 맨 뒷장에 박 사장, 애플턴 마이크론 사장, 이 행장이 차례로 서명했다. 모든 협상 쟁점에서 사실상 백기를 든 양해각서는 이렇게 맺어졌다. 매각 대금은 당초 합의했던 40억달러에 훨씬 못미치는 34억달러어치(당시 시가 기준)의 주식으로 대체됐다. 신규대출 15억달러에 대한 마이크론 본사 차원의 보증 제공, 주식매수청구권에 대한 대응자금 분담, 지식재산권 분쟁시 책임승계 등 채권단의 기존 주장은 전면 철회됐다. 따지고 보면 '백기 협상'은 이미 지난 3월 초부터 예고돼 있었다. 3월10일 김경림 외환은행장에게 전격적으로 경질이 통보되면서부터다. 임기가 1년 이상 남아 있던 김 행장의 경질은 어떻게하든지 하이닉스 매각을 성사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 표시였다는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행장에게 경질이 통보된 그날 이 행장이 채권단 대표 자격으로 미국으로 날아갔다. 당시에는 비록 MOU 체결을 하지 못했지만 그때부터의 협상은 더 이상 '협상'이 아니었다. 하이닉스를 매각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마이크론이 한 눈에 알고 있는 상황에서 협상은 '패를 보여주고 치는 카드게임'과 다를 게 없었다. MOU를 체결한 다음날인 4월20일 새벽. 박 사장이 무슨 생각에선지 일정을 앞당겨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이 행장과 함께 저녁 비행기를 타기로 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일정을 바꿨을까. 어쩌면 박 사장은 이 때부터 백기 협상을 사실상 총지휘한 정부에 '배반'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김인식 기자 sskis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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