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겨울 저녁 해 떨어진 얼음벌판으로 길 나서는 것과 같다면 그 고단한 시선이 머무는 곳에 성(城)이 있다. 높은 언덕 위에 푸르스름한 광채를 띠고.그 때 성은 성이면서도 이미 성이 아니다. 돌로 지은 집이면서 꿈으로 올린 공간이 된다. 그곳은 지도를 보고 찾을 수 없다. 눈을 감고 가야 한다. 성에는 반쯤 허물어진 벽,닫혀진 문이 있어서 길손의 여수를 부추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생명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리고 모든 것은 이별이기에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치려는 듯이.'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화영씨의 에세이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문학동네)은 단순한 기행문집이 아니다. 유럽의 고성들을 둘러본 체험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여행과 이별의 의미를 행간에 깔고 있다. 삶이 여행일진대 걸음을 멈추고 벼랑끝 사무치는 적막에 몸 떠는 순간이 온다. 그 때 일상의 무대 장치는 무너져 내리고 여행자는 홀로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여행은 자신을 둘러싼 것과의 작별을 연습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책에는 카프카의 장편소설 '성'에서 촉발된 생각을 따라 성의 시·공간적 의미를 추구한 불문학자의 숨결이 담겨 있다. 성에 관한 김씨의 꿈을 더듬어가다 보면 아름다운 셰비네 부인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 프루스트를 만나게 된다. 태양왕 루이 14세를 사로잡았던 멩트농 부인과 영원한 청년 조르주 상드도 나타난다. 시인 라 마르틴이 살았던 생푸엥 성과 발자크의 사셰 성도 웅장하다. 프랑스의 고성에서 눈을 돌리면 파리와 인도 아프리카의 풍경이 이어진다. 파리 개선문과 빅토르 위고 대로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위고의 80회 생일에 파리 시민은 특별위원회를 구성,도로를 꽃으로 장식하고 어린이 5만명을 위고의 집까지 행진시켰다. 이어 60만 시민들이 위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개선문으로 몰려들었다. 4년 후 노시인이 세상을 떴을 때 장례식 추모 인파는 2백만명에 이르렀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