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대통령 '이전'과 '이후'..朴孝鍾 <서울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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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대통령후보 수락장면은 인상적이다.
대의원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고,당직자 대신 소녀가장,장애인 등을 단상 위에 올렸다.
또 친인척 감찰기구를 두겠다고 공언했다.
모름지기 대통령 후보로서 좋은 몸짓이고 좋은 약속이다.
특히 큰절을 올린데는 국민을 하늘처럼 섬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 순간 그의 몸짓과 약속에 담긴 진의를 의심치 않으려 하지만,의구심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YS나 DJ도 역시 대통령이 되기 전엔 그렇게 몸을 낮추고 국민을 하늘처럼 섬기겠다고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국민을 쉽게 알고 독선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다가 민심이 이반되자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을 바꿨다.
'역사'란 말이 그 자체로 나쁠 까닭은 없지만,'국민'과 대비돼 사용되니 권위주의적 느낌이 물씬 풍겼다.
또 친인척 권력비리를 경계하겠다며 장제스 총통의 며느리에게 권총자살을 권유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고,또 청와대에 친인척 관리 비서관까지 두었지만,어느새 '젊은 소통령'과 '영식님'소리가 들렸다.
가신그룹도 집권한 후엔 절대로 임명직 공직은 맡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소리없이 청와대와 내각의 요직을 향해 돌진했다.
또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탕평책 인사를 하겠다며 큰소리치더니,대통령이 된 후에는 지역편중인사를 하면서도 인사의 지역적 균형을 위한 조치라고 강변한다.
도대체 대통령 되기 이전과 이후에 태도가 표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직은 연애와 구애기간 아내될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결혼하고 나면 위세 부리는 남편의 모습과 비슷해서일까.
하지만 대통령직은 결혼과 다르다.
혹시 화장실 들어가기 전·후의 상황과 비슷해서일까.
물론 대통령직은 화장실 들어가는 것과 다르다.
실상 까닭은 다른데 있다.
우리 대통령직은 한번 대통령이 되면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을 빼놓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만 만족하는 총리를 거느리는 대통령,집권여당의 총재로서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대통령,행정부 인사는 물론 공기업 낙하산 인사권까지 행사하는 대통령,국세청 검찰청 국정원 등 권부를 좌지우지하는 대통령…,그래서 대통령의 권한을 '대권'이라고 하는가 보다.
결국 무한 권력이 사람을 바꿔놓는다.
아무것도 없던 사람도 대통령이 되면 모든 걸 다 갖는다.
로열 패밀리도,가신그룹도,황태자도 거느린다.
과거 왕정의 통치자는 유교적 규범과,신하들의 잔소리와 쓴 소리에 정신도 차리고 하고 싶은 일도 자제했는데,오히려 민주체제에서는 대통령 권한 견제 시스템이 없다.
이런 '대통령 무책임제'하에서는 대통령에게 호령하는 권한과 통치권만 있을 뿐,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혹시 탄핵이야기만 나오면 금기사항을 건드린 것 같은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니 대권을 잡으려고 온갖 기교를 부린 다음,대권을 잡고 나면 권력의 황홀함에 도취돼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아니 잊는다기보다는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제왕적 대통령이 군림하는데는 분명히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시스템 부실에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왜 대통령이 된 후에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맹세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이전엔 시어머니를 욕하다가,정작 시어머니가 되면 그 욕한 시어머니 흉내를 내는가.
우리는 대통령이 된 사람이 쓴소리를 양약으로까지 알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쓴 소리하는 사람을 박해하거나 매도하지 않는다면,그것만으로도 민주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가윗날 우리는 자주 '오늘만 같아라'라는 말을 한다.
무릇 대통령이 된 사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 후보수락 연설 장면을 비디오로 찍고 그것을 하루에 한번씩 보면서 '오늘만 같아라'라고 다짐한다면,구차하게 대리사과를 하고 권력형 비리게이트가 온통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참담한 일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 후보수락 연설 장면을 마음 깊이 새길수록 권력의 오만함을 떨쳐버리고 낮은 데로 임할 수 있지 않겠는가.
parkp@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