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칼럼 '박성희의 괜찮은 수다'] 월드컵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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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 싶어지는 때가 있다.
쉽게 바뀔 것 같던 게 난공불락 꼼짝도 않는가 하면 좀처럼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게 어느 날 "확" 변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한 지 만 7년.
자유로에서 성산동 사천교를 거쳐 연대와 이대 앞을 지나다니는 요즘 "도시라는 게 이렇게 진화하는 거구나" 싶다.
난지도는 무엇보다 자연과 인간의 힘 모두에 탄복하게 한다.
이사하고도 한참동안 자동차의 공기구멍을 막아야 할 만큼 역겨운 냄새가 나던 쓰레기섬 난지도에 어느해 봄 푸른 기운이 돋았을 때 눈을 의심했다.
바로 옆에 월드컵축구장을 짓고 공원을 만들겠다며 메타세콰이어를 심을 때만 해도 "글쎄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의심을 비웃듯 축구장의 위용은 드러나고 난지도는 무성한 숲 위에 바람개비 돌아가는 근사한 공원으로 변했다.
어두컴컴하던 자유로는 늘어난 가로등 덕에 환해지고,자유로에서 성산동 쪽으로 꺾어져 사천교로 이어지는 길 가로수받침대는 기막히게 가지런하고 길가 곳곳에 마련된 "꽃밭"은 눈이 시리도록 예쁘다.
뿐이랴.
보도블럭에 올록볼록한 장애인용 유도블럭이 깔리고 횡단보도 앞은 물론 인도가 끊어지는 곳(건물과 건물 사이 차가 나오는 곳)마다 보도의 턱을 없애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 이용자가 다닐 수 있게 해놨다.
보도와 차도 사이에 차단대가 설치됐는가 하면 천편일률적이던 방음벽도 위치에 따라 투명 혹은 반투명 소재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하던 한강 다리의 조명은 얼마나 화사한가.
공중화장실이 늘어난 것도 반가운데 휴지까지 비치돼 있다.
국민소득이 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 도시 인프라가 확충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이 없었다면 올림픽공원이 어찌 생겼을 것인가.
마찬가지로 월드컵대회가 열리지 않는다면 과연 쓰레기섬 난지도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생태공원이 되고,공중화장실에 휴지와 온풍기가 생기고,보도블럭의 턱이 무슨 수로 그리 쉽게 무너졌을 것인가.
억지다 싶고 지나치게 호들갑스런 면도 적지 않다.
자유로 중앙분리대 부분의 경우 흙을 엎었다 갈았다 하더니 잔디 대신 한해살이 꽃을 심는가 하면 모양을 낸다고 꽃밭부분을 S자로 만들었으나 흙이 내려와 소용없게 됐다.
화장실 설비는 좋아졌지만 사용 행태는 여전히 엉망이다.
담배 피우고 침 뱉고 휴지는 바닥에 흘리고.
호수공원 첨단화장실의 경우 지난 여름 에어컨을 설치하곤 손대지 말라고 작동기기 부분에 시커먼 헝겊 테이프를 X자로 붙여놨다.
그것도 손으로 찍 찢어붙여 끄트머리가 너덜너덜한 채로.
보도의 유도블럭 또한 이제 시작이다.
눈가리고 아웅 하느라 한줄만 깔아놓은 곳도 많고 턱을 없앤답시고 갑자기 보도를 경사지게 만들어 고꾸라지기 십상인 상태로 해놓은 곳도 있다.
그래도 불가능할 것같던,하지만 언젠간 가능해졌으면 싶은 변화를 보는 일은 행복하다.
문제는 월드컵 대회라는 동인(動因)이 만들어준 "깨끗하고 함께 사는 도시" 만들기를 어떻게 지속시키느냐이다.
시인 이갑수는 "神은 시골을 만들었고/인간은 도회를 건설했다/神은 망했다"(신은 망했다)고 했거니와 실제 도시는 사람이 만든다.
기왕 만드는 거라면 깨끗하고 세련되고 장애인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
월드컵 덕에 빨라진 "아름답고 더불어 사는 도시" 꾸미기 노력이 단발성 행사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