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9년 3월31일.미국 증시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다우지수가 마침내 10,000선을 돌파한 것이다. 다우지수는 87년 2,000선을 넘어섰었다. 지수가 12년동안 무려 5배나 상승한 셈이다. 미국 증시가 이처럼 상승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그 에너지원(源)이 기관투자가라는데 이견을 다는 전문가를 찾기는 어렵다. 그중에서도 연기금은 미국 증시를 이끌어가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4월말 현재 미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9조달러.이중 40%는 연기금에서 들어온 자금이다. 연기금이 주식투자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익률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대의 연금관리기구인 캘퍼스가 지난 18년간 가입자에게 지급한 연금의 이자율은 연평균 12.2%에 달한다. 은행 예금금리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캘퍼스의 보유자금은 지난 85년 2백80억달러에서 2001년 1천5백60억달러로 늘어났다. 이중 60% 이상은 주식시장에서 운용되고 있다. 미국 연기금의 공격적인 자금운용은 주식시장에 선순환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미국 뉴욕의 교직원연금관리기구인 TIAA-CREF의 마틴 메이보위츠 투자책임관은 "우리의 투자철학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안정적인 수익창출"이라고 말한다. 그는 저평가됐을 때 샀다가 목표가격이 오면 파는 게 기본 전략이라며 이것을 '시간과의 싸움'(test of time)이라고 설명한다. 기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시각에서 투자를 결정하고 자금을 회수한다는 것.미국 증시에서 10년,20년짜리 초장기 투자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목표주가가 달성되면 자금을 빼낸다. 반면 저평가되면 더 사들이는 기본에 충실한 투자가 이뤄진다. 따라서 시장은 지나치게 과열되거나 침체되는 일이 없어진다. 안정적인 지수흐름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이에 반해 한국은 '냄비증시'의 닉네임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종합주가지수는 1년에도 몇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미국은 물론 홍콩이나 대만보다도 지수 변동성이 훨씬 크다. 이는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홍콩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은 51%,대만은 32%다. 한국은 9%에 불과하다. 장기투자자금으로 만들어진 버팀목이 없는 까닭에 지수가 미풍에도 출렁이는 것이다. 외국인이 주식을 사들이면서 주가가 오르면 시장에 자금이 모이고 기관이 떼밀려 주식을 사고 나면 외국인은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악순환의 고리도 여기서 비롯되고 있다. 정부가 최근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비율을 20~30% 수준으로 높이기로 한 것은 이런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장에 자금을 더 투입하기 전에 고쳐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투자철학을 갖는 일이다. 정부가 침체 증시의 구원투수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평가손이 나면 국회까지 나서서 닥달하는 행태도 개선돼야 한다. 미국 롱아일랜드대학 정삼영 교수는 "연기금 운영주체는 과학적인 운용기법 개발과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키워야 하고 정부는 자금운용에 대해 철저히 독립성을 보장해줘야 연기금이 시장의 주체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미국)=조주현 기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