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열정.중년층은 향수를 느끼고 청소년은 낭만을 떠올리는 어휘다.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향유했을 터이지만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순수는 너무 희기에 더럽혀지기 쉽고 열정은 너무 붉어 타버리기 쉽다. 김동원 감독의 데뷔작 '해적,디스코왕 되다'는 젊은날을 채록한 액션코미디다. 그것은 중년에게는 '가난하지만 따스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담이지만 신세대에게는 잃어버린 동심을 새롭게 비춰주는 거울이다. 엉뚱한 세 고교생의 '바보들의 행진'은 폭소와 웃음을 시종 동반한다. 배경은 1980년대 초반 도시 변두리의 달동네.주인공들과 동네 깡패들이 야산에서 벌이는 패싸움으로 시작된다. 이 장면은 살벌하다기보다는 코믹하다. 피로 범벅되는 조폭들의 칼싸움이 아니라 동네 불량배들의 무수한 헛발질이 가득하다. 흑백 영상에다 연탄재가 뒹굴고 똥지게가 오가는 달동네 좁은 골목이 20년전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투영한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추억의 열차'에 주저없이 올라탄다. 싸움꾼 해적(이정진)과 그의 단짝 성기(양동근)와 봉팔(임창정)은 싸움질과 좀도둑질로 소일한다. 이들은 봉팔 가족의 불행으로 예기치 않은 길로 접어든다. 봉팔의 아버지(김인문)가 똥리어카를 끌고 오다가 내리막길에서 사고를 당해 몸져 눕자 봉팔의 여동생 봉자(한채영)가 병구완 비용을 빌려쓴 탓에 디스코테크에 팔렸다. 삼총사는 봉자 구출을 위해 '디스코테크 습격사건'을 벌인다. 사랑과 우정은 주인공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다. '호빵을 입에 문' 봉자를 처음 본 순간 해적은 한눈에 빠진다. 성기는 친구 해적과 봉팔의 딱한 사정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 이들이 가난의 상징 '똥지게'를 기꺼이 함께 지는 모습에서 가장 비루한 곳으로 몸을 낮추게 한 사랑과 우정의 힘이 발견된다. 극중의 디스코는 열정과 순수를 대변한다. 봉자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디스코 경연에 나서는 해적에게 디스코는 새로움에 도전하는 열정의 대상이다. 꽃무늬 셔츠와 판탈롱 바지를 입고 손가락으로 사방팔방 찌르면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그의 모습에선 가공되지 않은 젊음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 시절의 미덕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이다. 20년전의 상황 설정과 소품들이 이를 방증한다. '똥지게''서울우유병''자전거오토바이''주황색 공중전화' 등은 오늘의 일상에선 찾아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순수와 열망도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특히 '똥지게' 관련 장면들은 가난한 시절의 애환을 웃음으로 포장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 대신 똥을 펐어.그런데 씻어도 씻어도 냄새가 나. 똥이 똥인지 내가 똥인지 구별도 못하겠어." 눈물어린 봉팔의 이 말은 슬픔의 연못 위에 핀 웃음꽃과도 같다. 동시에 빈곤은 당시 사람들을 옥죄던 흉칙한 괴물이었음을 드러낸다. "후까시 한번 네모 반듯하게 넣어 버렸구마이" (디스코테크 주인(이대근)을 보며 한 인근 술집 배 사장(안덕환)의 말) 등 조연들의 코믹한 대사도 양념거리다. 다만 싸움꾼이 디스코왕이 된다는 단선적인 서사구조는 흥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추억으로의 여행은 관객들에게 값진 감흥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ty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