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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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고'로 불리는 발칸반도의 아드리아해안을 끼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주변 인종들과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야 했고,몇년전에는 '인종청소'에 치를 떨어야 했다.
1991년 맨 먼저 독립을 선언해 유고연방해체의 도화선이 됐던 크로아티아는 '인간 도살자'로 낙인 찍힌 밀로셰비치의 '대(大)세르비아'건설에 맞서 싸우다 수십만명이 살해당했고 1백만명이 강제 투옥됐다.
4년간에 걸친 내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해졌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내전 종식후에는 복구가 활발해져 수도 자그레브는 이제 활기에 차 있으며,연간 1천만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지중해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아드리아해안과 중세 유적지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유고연방 시절에도 크로아티아는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슬로베니아와 함께 공업이 가장 발달했었다.
도나우 평원의 석탄생산량은 연방에서 최대였고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풍부해 산업국가로서의 도약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리리아족인 크로아티아가 역사상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9세기께다.
당시 북부는 프랑크왕국,동부는 동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오다 925년에 통일이 되면서 가톨릭국가가 됐다.
이후 헝가리의 통치를 받았고 15세기 후반에는 계속해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에 시달리다 종국에는 합스부르크가(家)에 왕위를 내주었다.
그후 다시 헝가리에 합병되었다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왕국의 일부가 됐고 2차대전이 끝나면서 유고연방의 공화국이 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유고연방을 창설하며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티토가 크로아티아인이어서 그의 생존시엔 연방제에 적극적이었다.
나라 존폐의 위기를 거듭 겪어온 크로아티아는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후보인 이탈리아를 꺾어 나라 전체가 온통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고 한다.
지난번 프랑스 월드컵때는 3위를 한 기록을 갖고 있어 이변이랄 수는 없겠지만,"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태져 더욱 환호하는 것 같다고 외신은 전한다.
국민의 결집된 힘을 모으는 데는 축구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