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 런던의 크리스티경매장에서는 '샴 대사'라는 제목이 붙은 목탄 스케치화(20x30㎝)가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액인 5억3천만원에 팔려 국내외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었다. 이 그림이 이토록 비싸게 경매된 것은 화가가 그 유명한 동화 '프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성당의 벽화를 그린 루벤스(1577∼1640)였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특히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은 그림속의 인물이 '샴 대사'가 아닌 조선사람이어서였다. 샴이라면 태국을 지칭하는 말인데 얼굴이나 의상 등이 태국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두루마기에 탕건을 쓰고 있는 영락없는 조선사람이었다. 복식전문가들은 조목조목 고증을 들어가며 조선 중기의 사람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루벤스가 1608년에 그렸다고 하는 이 그림에 어떻게 조선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몇몇 기록을 훑어보면 이렇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 땅에서는 4만∼5만명 가량의 청년들이 포로가 되어 일본 규슈의 나가사키 등지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나가사키는 포로들이 넘쳐나 인도의 고아,중국의 마카오,포르투갈의 라고스와 함께 세계적인 노예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조선 청년 중 한 명이 이탈리아로 팔려갔는데,이 청년은 곧 노예신분을 벗었고 거장 루벤스를 초청해 초상화를 그릴 정도의 부를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탈리아 남동쪽 바리(Bari)부근에 터를 잡고 성(姓)도 아예 코레아(Corea)로 바꿨는데,코레아마을로 불리는 알비시에는 지금도 3백여명의 코레아씨가 거주하고 로마에도 코레아씨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림속의 인물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피렌체의 노예상인인 카를레티가 쓴 '나의 세계 일주기'라는 책에도 분명히 기술돼 있으나,그리스의 코레아 성씨들이 넘어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탈리아의 오랜 인연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토끼 모양의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에다 기질까지도 닮았다고 하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오늘 월드컵 8강진입을 위한 대회전을 펼친다. 멋진 한판을 기대해 본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