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월드컵에서 승리했다. 순위는 다음 문제다.' 8강을 가리는 한국-이탈리아전이 열린 18일 서울 사람도,울릉도 사람도,총수도,넥타이부대도,주부도,학생도 당당하고 가슴 뿌듯했다. 이탈리아전 승패를 떠나 우리 한국인은 월드컵에서 승리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됐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태극전사들의 '드리볼'과 '준족'뿐만 아니었다. 월드컵 사상 유례없는 거리 응원단의 열정과 질서의식,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이뤄낸 국민의 일체감,히딩크 감독을 영웅으로 받아들인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 등은 세계 스포츠의 새 장을 열었다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서울 S대학 대학원생 배모씨(26)는 "16강을 넘어 8강과 4강 또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기대일지도 모른다"면서도 "경기의 승패를 떠나 우리는 세계의 '한복판'에 섰고 지구촌을 위한 잔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성숙한 시민의식=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민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관중석이나 경기장 주변에서 쓰레기와 무질서,난동과 사고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팀 경기는 물론 외국팀의 경기가 치러지는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로 훌륭한 응원문화를 보여줬다. 특히 한국팀의 16강 진출이 확정된 지난 14일 '광란의 축제'가 벌어진 신촌 압구정 대학로 등에서의 정연한 질서는 눈부신 시민의식의 절정이었다. 수십만명이 서로 뒤엉켜 열정적으로 승리를 축하하면서도 사소한 사건 사고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주부 김모씨(34)는 "질서정연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가 지하철을 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며 "이같은 시민의식이 우리 사회 전반의 새로운 활력과 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민 에너지 재결집=무엇보다 월드컵은 16강 진출이라는 가시적인 성과 이상의 것을 한국민에게 줬다. '한국민은 혼자서 일을 하면 정말 잘 한다. 하지만 함께 모여서 일을 하면 별로다'라는 이야기는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은 이런 고정관념을 1백80도 바꿨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밤새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응원 열기는 축구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대기업 CEO(최고경영자)에서 샐러리맨 주부 학생 등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동안 잠재돼 있던 한국민의 열정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뉴소프트기술 김정훈 사장은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때도 우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지만 일회성으로 끝났다"며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형성된 단합 분위기가 지속돼 선진 국민문화로 정착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쏟아지는 외부의 찬사=베이징 최대 일간지 천바오는 최근 '한국의 선수와 응원단 모두 국가 발전을 위해 몸을 바친 영웅'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또 천바오는 "중국은 축구공 하나로 전 국민이 똘똘 뭉친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국 언론들은 한국팀의 돌풍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한국민의 성숙한 시민의식 등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민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즐겁게 지내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최대한 기울였다는 것. 프랑스팀의 탈락에 실망한 프랑스 방문객들도 한국에서의 체류는 '감동적'이었다고 표현했다. 예전에는 한국을 거의 알지 못했지만 정답고 따뜻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 "프랑스팀을 열렬히 응원해준 서포터스의 호의는 놀랍기까지 했다"고 프랑스 대사관 관계자는 전했다. 특히 한국민들의 길거리 응원은 세계를 경악케 하며 찬사를 자아냈다. '열정적이면서도 질서 정연하다'는 게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은 길거리 응원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다. 서울대 경제학부 송병락 교수는 "월드컵을 통해 일본과 함께 아시아의 '리더 국가'라는 이미지 개선 효과를 얻었다"며 "이런 직·간접의 경제적인 부가가치 창출 효과를 넘어 모두가 하나된 국민의식이 새로운 차원의 애국심으로 승화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회부 종합 soc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