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2 15:57
수정2006.04.02 16:01
한국과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보기 위해 18일 4백만명 가량(추정)의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섰다.
이같은 숫자는 특정 이슈 때문에 몰린 역대 군중 규모를 가볍게 뛰어 넘는 신기록이다.
지난 4일 폴란드전 52만여명, 10일 미국전 77만여명, 14일 포르투갈전 2백78만여명 등으로 월드컵 열기에 비례해서 응원 인파도 기하급수로 불었다.
한국의 현대사를 장식한 군중 운집 기록을 돌이켜 본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시민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 때는 지난 87년 6월 항쟁.
이해 6월26일 전국 33개 도시 2백70개 장소에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 1백40만명이 모였다.
김대중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출마한 87년 말의 대통령 선거 운동 때도 많은 인파가 몰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12월12일에는 노태우 당시 후보가, 11월29일엔 김대중 후보가, 12월5일엔 김영삼 후보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 각각 1백30만명의 지지자들을 동원했다.
12월13일 김대중 후보의 서울 보라매 공원 유세엔 1백50만명이 모이기도 했다.
지난 71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개최한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는 1백만명 이상이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당시 장충단 공원부터 동대문까지의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4.19 혁명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60년 4월 혁명 당시 서울시내 거리로 뛰쳐 나왔던 인파는 대학생 고교생 시민들을 합해 약 10만명으로 추산된다.
지난 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 '박정권 타도' 등을 구호로 내걸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 시위에도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64년3월24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발발한 데모에는 5일간 서울시내 및 지방대 학생 약 13만명이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측 자료에 따르면 3개월간 전국에서 2백2만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 나와 '만세'를 외쳤다.
이방실.이상열 기자 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