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국인과 붉은 악마 .. 洪準亨 <서울대 公法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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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準亨 < 서울대 公法學 교수 / 베를린자유大 초빙교수 >
이탈리아를 이긴 감격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스페인과의 결전이 내일이다.다시 또 가슴이 두근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붉은 악마들의 물결,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의 열광과,거리로 나온 수백만 군중들의 환희 속에 월드컵의 6월이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이번 월드컵 하이라이트는 단연 한국인의 열정일 것이다.
4천7백만 국민,아니 해외에 퍼져있는 한국인 모두가 축구광이 된 듯,한목소리 한마음이 됐다.
전 세계가 놀랐다.
지구촌 모두가 분단된 나라 한국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그 엄청난 열정과 응집의 에너지를 분출하는지 경이롭게 목격했다.
출신지역,빈부,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인은 하나가 됐다.
일부 해외 언론은 공동개최국인 일본과의 냉담한 관계를 트집잡았다.
더러는 전국을 뒤덮은 붉은 악마의 색깔과,경기장에서의 카드섹션 등 단합된 면모에 놀라면서도,스포츠 내셔널리즘의 전체주의적 발로를 연상하기도 했고,일본과의 과잉경쟁,국제축구연맹(FIFA)의 비리 등을 들며 월드컵의 어두운 곳을 짚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오해거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번 월드컵에서 FIFA는 그 어느 다국적기업 못지않은 거액을 벌어들이면서도,각종 부패와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아 '복마전 같은 FIFA'를 개혁하는 문제는 향후 대두될 가장 대표적인 이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스포츠 내셔널리즘 운운하는 것은 '밑으로부터 생성된 자발적 동호회 조직'인 붉은 악마의 실상에 비추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더욱이 공동개최국 일본과의 냉랭한 관계를 꼬집는 것은,한·일 관계의 역사적 배경이나 최근 월드컵 개최를 둘러싸고 양국이 보여준 행태에 비추어 실상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이다.
월드컵 공동개최국간 화합이라는 천진난만한 기대는,실은 월드컵의 통합 효과에 대한 대단히 잘못된 맹신에서 비롯된다.
월드컵은 스포츠 차원에서 화해의 아름다운 음률을 내지만,월드컵을 공동개최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를 두루뭉수리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공동개최국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일진대,최근 교과서검정 문제,신사참배 문제,위안부 문제,자위대 해외파견 문제나 각료의 핵무장 가능성 시사 등 한·일간의 주요 현안을 다룸에 있어 일본이 보인 태도는 월드컵 공동개최국으로서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나마 일본은 협상 끝에 결승전 양보라는 대가를 치르고 합의된 '한·일 월드컵'의 명칭조차 슬그머니 바꾸려 하기도 했다.
또 공동개최국으로서 일본이 보여준 행태들이 상호 신뢰의 구축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재를 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도 분명하다.
한·일 관계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화합의 멜로디만을 아쉬워하며 트집을 잡는 것은 옳지 않다.
반면 월드컵의 엄청난 흡인력은 최근 지방선거를 치른 우리 정치에 커다란 부담을 남겼다.
국민들은 짜증나는 정치대신에 어슴푸레 희망이 깃든 월드컵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결과 사상 최저수준의 선거참여율에 따른 대표성 문제도 문제지만,정치지형이 지나치게 단순화됨으로써 향후 정국운영의 불균형이 우려되고 있다.
야당은 표정을 관리하면서 '대통령의 아들들'이라는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배가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이 스포츠를 마약처럼 악용한 것이 문제였다면,이번에는 월드컵이 도리어 정치를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저변을 이룬 붉은 악마들은 매우 애국적이면서도 보수적이지 않고,정치에 혁신적이면서도 너무 진지하지는 않은,그러나 그렇다고 순전히 흥미위주만도 아닌,한마디로 형언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이 전 세계에 새로운 한국인의 얼굴을 뚜렷이 각인시킨 것은 이탈리아 등을 이긴 것보다도 더 큰 월드컵의 기적이었다.
이제 히딩크와 대표팀 선수들 같은 정치인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새로운 한국인들이 피폐한 우리 정치에 대해서도 '오! 대한민국'이라는 열정의 구호를 외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joonh@t-online.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