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사건, 특히 전쟁이 현재 자본주의 경제의 제도적 기초들을 형성해 왔다." 옥스퍼드대 역사학과의 니알 퍼거슨 교수는 그의 책 '현금의 지배'(김영사, 류후규 옮김, 1만9천9백원)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서구의 경험으로 볼 때 세무관료, 채권시장, 중앙은행, 증권시장 등 현대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제도들이 전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전쟁을 위한 대규모 국채발행은 회사채 및 주식의 발행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간 자본시장의 발전을 가져 왔다. 또 초기에는 지폐발행과 국채관리만 맡았던 중앙은행이 점차 환율관리와 최종 대부자의 기능 등으로 역할을 확대하면서 신용제도의 안정적 발전을 이뤘다고 설명한다. 퍼거슨 교수는 이 책에서 1700년 이후 최근까지 구미 강대국의 정치 및 경제사를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분석한다. 그는 이미 '종이와 쇠' '로스차일드 일가' '전쟁의 연민' '실제의 역사' 등 독특한 역사서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경제가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 즉 '낡은 경제결정론'은 물론 현대의 여러가지 '새 경제결정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적 동기가 현대사의 지배적인 동인(動因)이었던 적도 있지만 성과 폭력, 권력 등 인간본성에 내재된 다양한 충동이 더 지배적이었던 경우도 많았다는 설명이다. 심지어 인종이나 종교 같은 비경제적 사안을 둘러싼 충돌 때문에 의회나 정당 등의 현대 정치제도들이 진화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현대국가의 골격인 의회, 징세제도, 공공채무 관리, 중앙은행 등 '권력의 사각형'이 보다 발전된 재정제도를 운영하려면 독재체제보다 의회제도나 민주체제가 더 유리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냉전종식 후 세계유일의 초대강대국이 된 미국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이다. 과거 '팍스 브리태니카' 시대에 영국이 담당했던 역할을 미국이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미국은 딱딱한 껍질 속에 몸을 숨긴 달팽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보다 많은 재원을 지출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서론과 결론 외에 정부지출과 과세, 지불약속, 경제정치학, 범세계적 권력 등의 4부, 14장으로 짜인 이 책은 화폐, 채권.주식시장, 과세와 국력의 상호관계, 이것들과 전쟁의 인과관계 등을 방대한 역사자료를 토대로 분석하고 있다.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