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간의 월드컵은 틀에 박힌 일상을 벗어던지는 참으로 유쾌한 일탈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는 이웃의 집단적 해방의 몸짓에 동참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잠결에 길 떠나 멀리 낯선 곳에 당도한 자신을 발견한 몽유병에 집단 감염됐던 느낌이다. 그러나 월드컵 준결승전 이후 우리는 다시 덤덤한 현실의 일상 생활로 복귀할 채비를 해야 했다. 구성원간에 날로 따스함이 식어가는 가정,산업사회 속의 따분한 직장,부정·부패·비리로 오염된 정치계와 관청 주변 얘기로 도배하는 대중매체,종합주가지수 700선이 위협받는 증시가 우리의 일상일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직시하고 극복해야 할 냉정한 현실이다. 히딩크 감독의 고향 네덜란드의 문화역사학자 후이징거(J Huizinga:1872∼1945)는 인간사회 속에 놀이(게임)요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놀이터의 어린이들,변증법을 구사하는 철학자들,원고와 피고간에 잘잘못을 가리는 법조인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을 18세기 계몽사상가들처럼 '이성적인 인간(호모 사피엔스)'이나,19세기 이후 산업사회가 부각시킨 '생산하는 인간(호모 파베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 1938년 저서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 시비야 어찌됐든 우리는 놀이가 인간문화의 중요요소임을 인정해야 한다. 후이징거 사상을 잘못 이어받아 60년대에 암스테르담 거리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산업사회와 소비문화를 배척하고 놀고 먹는 히피족 문화가 꽃핀 적이 있었다. 물체의 운동과 정지처럼 사람에도 일과 놀이의 적절한 배합이 필요하다. 양자간의 상생관계를 높여 일 속에 보람과 즐거움이 있고,일의 효율 제고를 염두에 두는 놀이가 바람직하다. '붉은 악마'에 동참한 전국민적 응원 열기가 한국 축구를 4강에 오르게 한 공이 있는 반면,경기 이후 집단 우울증 발병을 몰고 올 수 있는 허물도 있다. 놀이의 소중한 교훈은 그 승패가 생사 문제가 아니라는 일깨움이다. 무지개는 신비에 가까울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무지개의 끝은 공허하다. 월드컵 우승은 축구를 즐기는 2백여개국 수십억 사람들이 선망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무지개일 뿐이다. 월드컵 우승 기록 다수보유국들이 반드시 경제·정치·사회문화 차원에서 순위가 높은 나라가 아니다. 독일처럼 국민경제,사회질서,삶의 질 등 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잘 나가는 나라여야 우승컵이 금상첨화가 될 수 있다. 브라질처럼 외환위기의 위협조짐이 농후하고,사회불안이 심각한 나라에 기왕 다섯번 우승컵 획득이 무슨 의미가 있고,여섯번째 우승컵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그간 표면아래 잠재하던 국민의 자신감,일체감,시민의식이 월드컵 기간 중 발굴되고 다져졌다. 이것은 한국이 선진사회로 발돋움하는 데 소중한 무형자원이다. 이 자원을 적극 활용하려면 다음 몇가지 월드컵 교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첫째,큰일을 미리 계획하고,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금번 월드컵 개최의 유치·계획·추진이 먼저 있었기에 현 정권에서 실행에 옮겨 성공리에 마감할 수 있었다. 역할 분담에 있어서도 민간이 정부를 앞질렀다. 통일과 같은 국가대사에 있어서도 정권간·세대간 분업의식이 요청된다. 둘째,사회 공동체를 지탱하는 결속력을 어떻게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느냐이다. 개인주의는 원심력을,집단주의는 구심력을 부추긴다. 그간 팽배했던 개인주의·분파주의가 대회기간 중 광장·거리에 모인 군중 속에 스스로 함몰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일부 외국인들에게 부러운 단결력의 과시인 동시에 또 다른 이방인들에게는 섬뜩한 전체주의 그림자를 감지하게 했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개인 프라이버시 존중과 시민 질서의식이 공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제가 있다. 셋째,꿈이 있어야 살맛이 있고,산은 높아야 오르는 맛이 있다. 축구가 4강에 오른 데 그친 것은 천만다행이다. 결승전에 올랐더라면 꿈을 잃고 오만 방자한 국민으로 해외에 비쳐질 수 있었다. 어떤 일에나 시간의 검증이 있어야 세계 일류대접이 주어진다. 신데렐라 동화보다 시시포스 신화를 익혀야 한다. pjkim@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