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명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은 TV나 마약에 중독된채 현실을 외면하고 달콤한 꿈에 갖혀 산다. 그 꿈은 치명적인 독이다. 잠시 희망을 주는듯 싶지만 결국 절망을 안겨준다. 98년 "파이(π)"로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쥔 대런 아로노프스키감독의 두번째 작품 "레퀴엠"은 문명의 죽음을 고하는 장송곡이다. 마약복용과 혼음파티,잘못된 다이어트로 소멸해가는 인간들이 파격적인 영상에 등장한다. 초콜릿을 먹으며 TV다이어트 강의 "태피티본스쇼"를 즐겨보는 미망인 사라(엘렌 버스틴), 그녀의 TV를 내다팔아 마약을 사는 사고뭉치 아들 해리(자레드 레토),해리와의 사랑을 위해 현실과 절연한 매리언(제니퍼 코넬리)는 순간의 성취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현대인들이다. 방송출연을 위해 마약으로 살빼기 작전에 들어간 사라는 단숨에 효과를 보는듯 싶지만 환각은 갈수록 심해진다. 해리도 마약장사로 잠시 목돈을 만지지만 결국 자신의 팔을 도려내고 애인 매리언을 창녀로 내몬다. TV를 쇠사슬로 묶어놓은 사라와 쇠사슬의 열쇠를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해리의 언쟁,서로의 몸을 쓰다듬으며 사랑을 확인하는 해리와 매리언의 속삭임은 좌우 화면을 분할해 처리했다. 모자와 연인의 대화는 끝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고 있다는 뜻이다. 현대가정의 두 아이콘격인 TV와 냉장고는 꿈의 성취와 좌절을 동시에 나타낸다. TV쇼가 사라의 꿈을 이뤄주는 매개체라면 식욕을 자극하는 냉장고는 꿈을 실패로 이끄는 장애물. 유혹과 위협을 동시에 가하는 문명의 양날이다. 혈관에 기포가 퍼져나가거나 동공이 풀리는 등 마약이 체내에 침투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에서도 감독의 재기가 엿보인다. 오는 12일 인사동 미로스페이스극장에서 개봉된다. 18세 이상.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