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FIFA(국제축구연맹) 한.일 월드컵"이 낳은 최고 스타는 누가 뭐래도 거스 히딩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다. 그는 월드컵을 불과 1년6개월 앞둔 지난 2000년 초 월드컵 첫승과 16강 진출에 목말라하던 한국 국가대표팀의 "구원투수"로 영입돼 4강 진출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이끌어냈다. 히딩크의 성공 비결로는 여러가지가 꼽힌다. 주위의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원칙주의,능력 위주의 인재 양성,합리적 의사결정,과학적인 성과 분석,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 등. 분야는 다르지만 한국의 은행장들도 여러모로 히딩크와 비교할 만 하다. 대부분 시중은행장들은 히딩크와 마찬가지로 외환위기 이후 은행을 구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이덕훈 우리은행장(KDI 출신),김정태 국민은행장(동원증권 출신),강정원 서울은행장(도이체방크 출신),이강원 외환은행장(LG투신 출신),하영구 한미은행장(씨티은행 출신) 등이 그런 경우다. '토종' 출신 시중은행장은 홍석주 조흥은행장,이인호 신한은행장,김승유 하나은행장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들 토종 은행장도 과거의 '전통적인' 은행장들과 달리 '히딩크식 경영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정태 행장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장 우선'이란 원칙을 초지일관 유지하고 있다. 경영진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 짜인 '다국적군'으로 구성했다. 또 지연과 학연 등을 타파하기 위해 인사카드를 없애기로 한 것이나 3,4급 직원을 지점장으로 대거 발탁한 것도 히딩크의 능력위주 인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김 행장 뿐 아니다. 국내 은행장들의 공통 키워드로 자리잡은 '능력위주 인사'와 '실적 및 내실 우선 경영전략'은 '능력위주 선수 선발'과 '원칙주의'를 내세운 히딩크의 전략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경영진(코칭스태프) 구성 등 다른 점도 적지 않다. 하영구 행장은 '히딩크식 다국적군'보다는 자신이 잘아는 씨티은행 출신으로 경영진을 구성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덕훈 우리은행장과 이강원 외환은행장은 순수 토종 출신으로 경영진을 구성,조직의 안정에 주안점을 뒀다. 중요한 것은 히딩크식 경영전략을 취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히딩크는 한국 축구의 현실을 냉정히 분석한 뒤 그에 알맞은 해법을 찾아냈다. 은행장들도 각자가 처한 환경에 걸맞은 경영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중요한 것은 히딩크식 성공스토리를 가능케 한 세가지 요인이 은행 경영에서도 실현될 수 있느냐 여부다. 히딩크는 절묘한 신구(新舊) 조화를 이룬 선수들로 대표팀을 구성했으며 이들로부터 진정으로 인정받는 카리스마를 형성했다. 또 몇번의 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협회로부터 철저하게 임기를 보장받았다. 은행장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채택한 전략을 흔들리지 않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 여부가 중요하다. 세대교체 바람에 휩쓸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직원을 쫓아내 버린다면 진정한 카리스마를 얻기 힘들다. 행여 당장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임기가 남은 은행장을 갈아 치우는 정부의 '못된 버릇'이 다시 도진다면 이 땅에서 '히딩크식 은행장'이 존재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지금 은행들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외환위기 이후 생겨난 부실을 모두 털어내고 진정한 승자를 가리기 위한 '진검 승부'를 시작했다. 당사자인 은행장들은 물론 감독당국도 '히딩크식 성공비결'을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