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화가는 스러져가는 존재의 아스라한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한 사람들이다. 인상이란 단어는 중요하지 않다. 에두아르도 마네와 클로드 모네가 주목한 것은 모든 존재는 허물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져 곧 안 보이게 된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잡아낸 것만 진실이다. 마네는 주로 인물,모네는 사물 그림을 통해 이같은 세계관을 펼쳤다. 시인 채호기씨의 신작 시집 '수련'(문학과지성사,5천원)은 예술행위의 의미에 관한 책이다. 시집 '밤의 공중전화' 등을 통해 물성(物性)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던 채씨는 수련(垂蓮)을 보이는 존재의 상징물로 보고 그 수련을 문학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창작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수련이란 식물은 특히 꽃잎만 내놓고 줄기는 물밑에 감춘다는 점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존재다. 모든 존재는 실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어떤 말로도 호명할 수 없고,그 어떤 생각도 닿지 않는다' 모네가 수련의 윤곽을 지우고 색의 무더기로 뭉개듯이 그린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학도 '수련(존재)을 위한 몇몇 말들의 설치'에 불과하다. '백지의 자궁으로 잉크가 흘러들고/수련을 잉태하고 있는 흰 백지에/분만을 준비하는 글자들의 구멍//너의 시선이 닿는 순간 수련은 피어난다/잔잔한 백지의 수면 위로/네 의식의 고요한 수면 위로'('백지의 수면 위로' 중) 여기서 '너(창작자)의 시선'은 빛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은 안타깝게도 미끄러지기만 한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도 빛은 사방에 넘쳐난다. 채씨는 "수련 연작을 통해 실물과 언어가 겹쳐지는 접점을 포착하려 했다"며 "시의 불가능은 가도가도 가능함에 다다르지 못함이며 그것이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윤승아 기자 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