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제약사 긴급해부] (2) '약값인하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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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다국적 제약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로버트 잉그램 부회장이 서울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의약분업 실시로 한국 시장이 많이 투명해지긴 했지만 신약의 값을 정할때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많은 리스크를 감내하고 개발된 신약에는 높은 가격이 책정돼야 한다"고 목청을 돋웠다.
"이번 방문기간중 총리도 만난다"며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올들어 다국적 제약사 경영진들이 한국을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있다.
GSK의 경우 잉그램 부회장 외에도 하워드 피엔 인터내셔널 사장, 존 쿰 최고재무경영자(CFO)가 다녀갔다.
릴리의 존 렉라이터 수석부사장, 머크의 폴 벨 아시아·태평양지역 사장과 루이스 만델 고문, 화이자의 무한 시리사이드 아시아.중남미 총괄사장도 한국 방문 대열에 끼였다.
다국적 제약사 경영진들의 방문을 이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투자 협의, 시장 개척, 제휴 등을 위해 언제라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의약분업 이후 이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을 뿐 아니라 정부 고위 인사들과의 접촉 또한 빈번해졌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이 업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도널드 에번스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해 7월 김원길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외국계 제약회사가 수입하거나 한국에서 생산한 의약품들은 참조가격제 하에서는 불균형하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문제가 적절히 해결되지 않으면 심각한 무역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다국적 제약사에다 미국 정부까지 나서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한국 정부의 약값 인하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약값을 둘러싼 신경전은 참조가격제 실시 방침 발표로 촉발됐다.
참조가격제란 약을 동일 효능군별로 분류, 일정한 수준에서 보험청구 상한액을 고시한 뒤 실제 약값과의 차액은 환자 본인이 부담토록 하는 것.
사실은 의약분업 후 오리지널 약 처방이 급증하면서 호황을 누리고 있는 다국적 제약사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발등에 불을 끄기 위해 발 벗고 나섰음은 물론이다.
한 관계자는 "한국이 국제 관행을 무시하고 보험재정만을 위해 약값을 인하할 경우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불만을 여러 차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원길 전 복지부 장관도 "미국 정부와 외국계 관계자들이 숱한 로비를 펼쳤다"고 말했다.
이같은 공세에 밀려 지난해 10월 시행하려던 참조가격제는 결국 보류되고 말았다.
이태복 장관이 다시 보험약가 인하를 추진하면서 또다시 갈등이 빚어졌다.
이 전 장관은 지난 4월 거래가격과 상관 없이 이미 책정된 약값을 정기적으로 재검토한 뒤 조정하는 '약가 재평가 제도'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5월에는 보험약가 조정 기준을 가중평균에서 최저 실거래가로 변경키로 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또다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이 장관은 옷을 벗고 말았다.
보험약가 재평가 제도는 3개월이 지나도록 시행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정부의 고가 의약품 억제 정책은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평균 5억달러를 투자해 신약을 개발하더라도 독점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기간이 이제 6개월 정도밖에 안된다"고 지적한다.
약값 인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약값 인하 공방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최승욱 기자 s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