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농림부는 들뜬 분위기였다. 북한의 서해교전 유감 표명에 따른 남북장관급회담 제의 사실이 전해지면서 '쌀재고 문제도 해결되겠구나'하는 기대감이 완연했다. 농림부 관계자는 "올해 추정 연말 재고가 1천3백18만섬으로 적정 수준(6백만섬)의 2배가 넘어 보관할 창고를 구하지 못해 고민해 왔는데 반가운 소식"이라며 "대북 쌀지원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쌀재고 처리를 대북 지원과 연계해 '일희일비'할 정도로 정부는 쌀문제를 미봉책으로 다루고 있다. 정부의 쌀정책은 위선적이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절대로 쌀개방은 않는다고 장담했지만 막상 93년 말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 협상에서 빗장을 풀었던 전철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2004년까지 추가 개방이 불가피한 '발등의 불'인 상황인데도 정부는 태연하다. 한국은 월드컵에서 4강을 차지했지만 경제 대국들이 모이는 다자간 통상 협상장에 가면 아직 '마이너리그'에 속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서창배 연구원은 "농업시장 개방은 유럽연합(EU)과 일본이 미국 등 농산물 수출국들을 상대로 얼마나 벼텨주느냐에 의존하는게 현실"이라며 "그런데도 정부 당국자들은 마치 우리가 통상 협상을 주도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책을 봐도 2년 후에 쌀시장을 추가 개방해야 하는 정부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현재 일종의 쿼터제(최소접근물량:MMA)로 쌀수입 절대량을 제한하고 있는데 2년 후에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처럼 관세만 정하고 수입량은 시장에 맡기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데도 정부는 '관세화'에 대해서는 쉬쉬하면서 쌀재고 처리가 정책의 전부인 양 씨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개방에 대비한 구조조정 작업이 구두선에 그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7월 초 농촌경제연구원이 쌀값 하락에 따른 농가 소득을 보상해 주는 소득보전직불제 개선 작업과 관련, 보상금의 일부를 보험료 형태로 농가에 부담시키는 구조조정 방안을 대통령 직속기관인 농어업.농어촌 특별대책위원회에 상정했지만 좌절될 위기에 놓였다. 한 참석자는 "방안은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농심을 의식한 나머지 채택 여부 자체가 무기한 연기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쌀문제를 놓고 뒤뚱거리는 것은 경제문제를 경제논리로 다루지 않고 '농민표'를 의식한 나머지 정치문제로 접근하기 때문. 게다가 농림부 외교통상부 재정경제부 등 농정 관련 어느 부처도 '총대' 메기를 꺼리기 때문에 대책 없이 그냥 벼량 끝으로 치닫고 있는 꼴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정치적 리더십 부재다. 어떤 정치인도 "공산품을 해외에 팔아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상황에서 농업 개방이 불가피하고 국제협상에서도 종속적인 위치에 있으니 앞으로 2년 후를 심각하게 보고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할 용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민승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정부는 국제시장 환경을 감안,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농민표를 의식해서 보호장치를 풀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며 "이런 식으로 대비 없이 추가 개방을 할 경우 결국 최대 피해자는 농민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