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일이 많아 아무래도 올 여름은 '방콕 여인(방에 콕 틀어박힌 여인)'이 돼야겠 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시원한 녹색을 눈과 폐에 채우지 않으면 도저히 못견딜 것 같아 강원도 오지(奧地)에 들어갔다. 조금만 가면 한계령이고 미시령이요, 또 조금 동쪽으로 조침령을 올라가면 낙산사가 있는 양양이라, 그만하면 마음의 오지(奧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를 닦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용한 마음의 빈칸, 오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산 속 오지로 들어간다 한들 마음이 불쾌하면 휴식과 재충전이 되지 않는다. 길을 나서면 교통 지옥이요, 교통 지옥의 힘겨운 두타행(頭陀行)을 거치고 나면 또 인파 지옥이요, 소음 공해다. 바닷가라고 나가보면 여기저기 도시적인 잡동사니 쓰레기가 몰려 있고, 핸드폰 소음은 도시의 망령처럼 우리를 졸졸 따라다닌다. 인파가 끊어지는 밤이 온다고 해서 오지의 밤이 조용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 가까운 민박집에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 놓았는지 가무를 즐기는 한국인의 특기는 어김없이 이 산 속에서도 열렬히 발산된다. 노래방 기계여, 어찌하여 이런 오지에까지 와서 광란의 야간 공연을 하는 것인가. 오지의 밤이 고요 속에서 마음의 깊은 오지(奧旨)로 열리기를 원했던 나는 노래방 기계의 발명과 대중적 확산을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산 속 피서지에서까지도 노래방 기계가 돌아가지 않으면 화끈한 실존을 느끼지 못하는 도시인의 노래방 중독증을 원망해야 할지 암담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겪었던 콜로라도 강변의 일이 떠올랐다. 그랜드 캐니언을 향해 가다가 콜로라도 강변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됐는데, 식사 후 우리 가족은 그 유명한 강을 떠가는 유람선을 직접 타보기로 했다. 어두운 강변을 흘러가며 '콜로라도의 달'이라는 유명한 노래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그 강을 지금 내가 흘러가고 있다는 감회와, 어떻게 이렇게 크지도 않은 강이 그토록 장엄하고도 환상적인 그랜드 캐니언을 빚어냈을까 등등의 감동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고요의 베일을 왈칵 찢어버리며 우렁찬 합창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은…' 운운하는 노랫말 가사가 한국말이어서 더욱 놀랐다. 아마도 동창회나 계 모임에서 미국 서부 단체관광을 함께 온 한국인들인 것 같았다. 어둡기는 했지만 옷도 잘 입은 부(富)티 나는 분들처럼 보였는데 어쩌자고 그 깊고 진지한, 아름다운 침묵을 단칼에 박살을 내버리는 것이었을까. 그 거침없는 용기, 그 벅찬 목청, 손에 손을 잡고 함께 열창하는 그 뜨거운 신명. 그 때 같은 유람선에 타고 있던 파란 눈동자 외국인들의 반응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들은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역병(疫病)이라도 만난 듯 몸을 움츠리며 모조리 그들의 반대편 방향으로 자리를 옮겨가는 것이었다. 그런 장소에서 그런 시간이면 누구나 조용한 침묵과, 거대한 자연과 영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집단으로 부르고 싶진 않지만, 한국인은 고요함이나 철학, 사색 같은 것을 즐길 줄 아는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그 때 실감했다. 고요함이란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요, 육체적 존재인 인간이 자신을 정신적 존재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거쳐 가야 할 문전과 같은 곳인데, 우리는 그 고요함을 잘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세속성의 징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에 들어가서 시끄럽게 소음을 낸다는 것은 자연에 미안한 일이다. 산에 가면 산의 이야기를 듣고,강에 가면 강의 이야기를 듣고, 바다에 가면 바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진정한 휴가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휴양림에 가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휴양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곡에 가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계곡의 물 이야기를 듣고 오자. 바로 그것이 내 마음의 오지(奧旨)와 만나는 길이며, 생활 속의 철학을 만나는 일 아닐까? 그래도 올 여름, 오지 중에서도 오지에 숨어 있는 설피 계곡의 비경과, 시립도록 차가운 물소리와, 향기로웠던 그 고요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에서 혼을 만났고, 또 그곳에 혼을 두고 온 것만 같다. < sophiak@mail.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