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21) '작가 전혜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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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 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몹시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이호철 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소음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담배를 피우면서도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맣게 끼어 있고,누군가는 그 불결한 손톱을 "검은 테가 둘러진 부고(訃告)"라고 일컬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독일 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 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였는지,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은 평남 순천에서 1934년 1월 1일에 전봉덕(田鳳德)의 8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일제 식민지의 악랄한 수탈에 모두들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 혜린은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원피스를 입었다.
그의 부친은 혜린이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쳤다.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 때문에 그의 부모는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神)이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나를 무제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범용함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전혜린이 보여준 처절한 고투(苦鬪)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언제나 극점(極點)을 추구하는 전혜린의 정신은 범속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 견뎌했고,언제나 "미칠 듯한 순간,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충만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갈망했던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질·인간·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관념·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다니는 병"이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 과목 성적은 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과락이 있는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 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 과목의 0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던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盜講)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그리고 온갖 종류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 시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