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씨 낙마에 따른 후임 인선이 늦어지면서 정.관계가 뒤숭숭하다. 적임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고사하기 때문이란 소문도 들린다. 청와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하기는 실무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과천 관가에도 청와대 파견 기피 현상이 심하고 청와대에서 나오면 '축하한다'는 게 인사라고 한다. 대통령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영악한 관료들만 아는 게 아니다. 기업인도 알고 농민도 안다. 북한도 훤히 알고 있을 것이고, 한국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다른 나라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르고 있고 기업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5일 근무제 입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외적으론 대통령 임기 중에 역사상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사시킬 태세다. 이들 정책은 나름대로 충분한 타당성과 당위성을 갖고 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지금' '동시에'라는 데는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레임덕에 빠져든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가 힘에 부쳐 보인다는 얘기다. 정책기조적으로 상충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주5일 근무제는 '도시근로자들의 노는 문제 내지는 삶의 질 향상'에 관한 것으로 '온정적 메시지'로 와닿는다. 반면 FTA는 우리 공산품에 대한 상대국의 교역장벽을 허무는 대신 농산물시장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는 농민들에게 '국제경쟁력 있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 퇴출당한다'는 '냉엄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근로자들에겐 '주5일 근무제'라는 달콤한 선물을 주면서 '왜 우리는 가혹하게 내모느냐'식의 반감이 생길게 당연하다. 이처럼 국민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운 정책들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집권초기 정부라도 힘든 일이다. 지금 이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은 아마 '당적까지 버린 대통령이 집권말에 오히려 사심없이 초연하게 추진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임기 중인 대통령의 치적을 역사교과서에 너무 치장하는 바람에 말썽을 일으킨 현 정부의 정서에 비추어 봤을 때 '과연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드는게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달말부터 막바지 협상을 벌이는 한.칠레 FTA가 어떤 방향으로 결론날지 관심거리다.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초기 '열린 통상국가' 기치를 내걸고 미국 일본과의 투자협정에서부터 칠레 멕시코 등과의 FTA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대외정책 구상을 발표했지만 한 건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동안 '선거의 표'로 나타날 '농심' 등을 의식한 나머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제 선거와 초연해졌기 때문에 정면돌파를 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정부 분위기를 보면 한국이 과일시장을 열지 않는 대신 칠레도 전자제품 등 우리의 핵심 공산품에 대해선 자유화를 보류하는 식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 경우 그야말로 '무늬만 FTA'가 되는 셈이다. 실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칠레와의 교역장벽을 없앰으로써 전자제품 등 핵심상품의 수출을 극대화하겠다던 당초의 정책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칠레 다음으로 예정된 멕시코 등과 통상협상을 추진하는데 부정적인 선례로 작용할 수도 있다. '반드시 임기내에 성사시킨다'는 식으로 시한과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 '대외협상의 금물'이란 것쯤은 현 정부도 모를 리 없다. 김 대통령이 내건 '열린 통상국가'란 명제는 교역으로 살아가는 한국의 운명적 여건상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계승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기말에 조급하게 밀어붙이기보다 초석을 놓는데 만족하는 것이 현정부가 그토록 신경쓰는 역사적인 평가면에서도 나을 것이다. < lee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