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화상은 `나'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남'과 같이 존재하는 `나'를 그린 대명사이다" 한 사내가 화폭에서 감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때로는 우수에 잠긴듯 침울하고, 때로는 폭발할듯 화난 표정이다. 웃음기를 좀처럼 찾기 힘든 가운데 내면 깊은곳에서 흘러 나오는 고독은 감상자를 공감의 세계로 조용히 인도한다. 성근 수염과 하얀 머리칼에는 희로애락이 소용돌이치며 교차한다. 미간 등 얼굴을 가르는 주름에는 세월이 새겨온 흔적이 지표면의 굴곡처럼 복잡다단하다. 동일인물이지만 나이는 청년기에서 노년기까지를 아우른다. 찬찬히 들여다 보면 어디서많이 본듯한 얼굴이다. 화가 강형구(48)씨가 자화상 작품만으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오는 14일부터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자화상전'이 그것이다. 전시는 이어 경기도 분당의 갤러리 삼성플라자(29-9월4일)에서도 개최된다. 첫 개인전을 가진 지 1년만의행보다. 쉰이 가까운 나이에 겨우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면 가벼이 여기기 쉽다. 그러나강씨의 작품은 규모와 필치에서 결코 예사롭지 않다. 젊은 날의 긴 방황이 그의 삶과 예술을 단단하게 벼린 뒤 곰삭게 하는 하나의 모색기였던 셈이다. 1973년 중앙대서양화과를 나온 강씨는 월간 `미술세계' 8월호의 표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포토 리얼리즘(Photo Realism) 기법의 자화상 45점이 나온다. 이는 사진효과를 캔버스에 전달함으로써 최대한 사진다워지려는 기법이다. 출품작 중가장 작은 그림이 120호짜리. 큰 작품은 1천호를 헤아려 드넓은 전시장의 벽면을 간단하게 뒤덮어버린다. 자화상 단일 개인전으로는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그에게 100호 이하의 그림은 아예 성에도 차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모두 강씨를 모델로 했다. 상상력으로 세월을 자유롭게 건너 뛰며그는 젊은 날의 초상부터 현재의 자신 그리고 늙고 병든 뒤 고요하게 숨을 거둔 얼굴까지 차례로 변주해나갔다. 특히 백발 성성한 노인의 모습에서는 뭐라 형언하기힘든 삶의 고뇌가 처연하게 배어 나온다. 그의 인물그림은 철저히 얼굴 중심이다. 가슴 이하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클로즈업 사진처럼 극사실적인 강씨의 작품은 감상자 시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는마력을 뿜어낸다. 뭔가에 홀린듯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작품 속 인물의정면성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화면의 거대성과 손작업의 정교함까지 가세해 감상자를 전율케 한다. 역설로 들리겠으나 작가는 결코 자화상을 그리지 않는다. 자신의 이미지만 차용할뿐 그림 속 인물은 어디서나 만나는 갑남을녀의 보편적 형상이다. 강렬한 눈빛과세필의 수염에 빨려들어간 감상자 자신이라는 얘기다. 강씨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대면시킴으로써 상호소통 효과를 극대화했다. 작품인물의 내면이 눈동자라는 창문을 통해 감상자에게 묵시적으로 말을 걸게 한 것이다. 10년 남짓 계속해온 강씨의 인물 작업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윤두서의 자화상과맥이 닿아 있다. 윤두서는 한 올의 수염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하되 천근 쇳덩어리라도 금방 끌어들일 것같은 눈동자의 자화상으로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강씨의 자화상은 자기성찰에 매달렸던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를 떠올리게도한다. 렘브란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갈파한 데카르트의 철학사상을화폭에 반영한 뒤 바통을 반 고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미지를 타자화했다는 점에서 강씨는 개인사를 드러낸 윤두서나 렘브란트와 다르다. 작가는 먼저 자신과 내밀하게 소통한다. 나아가 타자와 타자를 하나로 이심전심연결코자 한다. 강씨가 자화상에 `나'라는 고유명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남'과 같이 존재하는 `나'를 그렸다는 것은 이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해된다. 자화상을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재의미를 직관적으로 설파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모습까지 그린다는 점에서 강씨 작품은 일정 부분허구성을 띠고 있다. 지금의 발끝에서 일직선을 그은 다음 그 연장선에 놓인 미래상을 캔버스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의 이같은 예술적 상상행위는 동갑내기인 박정희전 대통령과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인물화를 83세에 맞춰 그릴 만큼 `상습적'이다. 강씨의 자화상은 국내외에서 제법 평판을 얻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200호짜리 그림이 애틀랜타의 카터센터에 소장돼 있다. 앙리 뒤낭의 인물화 등은대한적십자사와 올림픽회관에 걸려 있기도 하다. 요즘 그는 인생을 가불하듯 늙어 있을 때의 모습을 당겨서 더욱 자주 그린다.이에 대해 강씨는 "늙은 얼굴을 미리 그려봄으로써 젊음이 있었던가라는 회고보다젊음을 배신하진 않았나 헤아려보려 한다"고 설명한다. 젊음을 배신한 늙은 얼굴들이 현실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만큼 작가 자신이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id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