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대에는 독일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리스 터키 이집트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자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검은 머리수건,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전혜린의 유명한 검은색 옷과 검은색 스카프는 그 시절 습관의 연장이었다. 전혜린은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식사 부족,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오만한 젊음,순수한 정신,촌음(寸陰)을 아껴 노력'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경쟁했고 '목적을 가진 생활,그 일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돼 있는 생활'에 대해 만족했다. 전혜린은 독일 유학중 결혼을 하고,딸을 낳는다. 싸구려 번역과 고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한 번은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이 나서 그는 한 주일 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혜린은 "물은 마시니까,죽지는 않더라"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굶주림이었다. 전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번역 작업을 했다. 헤르만 헤세,하인리히 뵐,에리히 케스트너등의 독일 작품들이 전혜린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4년 독일 유학중 결혼한 남편과 합의 이혼한 후 전혜린은 몇 번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다. 인습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연하 제자와의 사랑도 있었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와 모교인 서울대 법대 강단에 선 교수 전혜린과 질풍노도와 같은 스무살의 '제자' 법학도는 독일어 강의가 있는 매주 수요일마다 만났다. 그들은 가장 첨예한 정신과 정신의 맞부딪침에서나 일어나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시를 써서 갖다 바치고,아직 새파랗게 젊은 여교수는 편지를 써서 제자이며 연인인 청년에게 건네줬다. 그들은 서로의 타오르는 혼에 경탄했고 서로를 찬미하며 정신의 충일 속에 취해 있었다. 어느날 청년에게 가문의 모든 꿈을 걸고 있는 시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전혜린을 만난 이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제발 자신의 아들과 헤어질 것을 호소했다. 청년은 그의 모친의 간곡한 만류를 받아들여 전혜린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때 전혜린은 시니컬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네가 날아올 땐 난 네가 독수린 줄 알았는데,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너의 사랑스러운 눈,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 금단현상(禁斷現象)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거침없는 태도,남자다움,총명,활기,지적 호기심,사랑스러운 너의 얼굴―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기 사흘 전 전혜린은 '장 아제베도'라고만 알려진 익명의 누군가에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중략).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나를 살게 해줘"라고 썼다. 그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고,절규였다. 일찍이 인생의 악덕을 눈치채고 지식의 황홀경 속에서만 헤엄치며 '식은 숭늉 같고 법령집 같은 나날'을 탈출하는 꿈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었던 전혜린은 너무 빨리 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그의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그 내면으로부터 남김없이 갉아먹어 버렸던 것일까. 전혜린이 익명의 사람에게 썼던 두 통의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은 채였다. 1934년 1월 1일 일요일에 태어난 전혜린은 1965년 1월 10일 일요일에 생을 마감했다.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