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물었다/ 뉘기신데 다들 갔는데 남아 계신지요?/…저는 맏아들입니다/나에겐 당신같은 아들 없는데요. 여하튼 감사합니다. 말씨 귀에 익은데 혹시 고향이 어디신지?/경남 거창입니다/아, 나하고 고향이 같군요/제 출생지는 함경남도 길주 대택이구요/대택,내가 오년동안 역장으로 있던 곳.시월 중순부터 큰눈 내려 사방 막막히 막히던 곳… 동향인이 그 막막한 곳에서 태어나셨다니, 참 우연이란 무섭군요'(황동규작 '무서운 우연') 아들은 못알아보면서 오래 전 잠시 머문 곳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아버지.치매의 징후는 이처럼 황당하고 슬프다. 뿐이랴. 특정사실에 대해선 거짓말처럼 말짱한 의식을 보이면서 수발하는 사람에겐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매일 다니던 길을 잊는다. 괜스레 문을 여닫는가 하면 심지어 며느리가 밥을 안준다고 여기저기 하소연, 온가족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치매가 오래 계속되면 '누구도 견디기 어렵다'고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치매는 그 자체가 병이 아니라 각종 질환,특히 알츠하이머병에 의해 주로 생기는 증상이라고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뇌에 생긴 비정상적 단백질덩어리(노인반ㆍ신경섬유다발)가 뇌신경세포를 죽여 일어나는 퇴행성질환이다. 1906년 이상단백질을 발견한 독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의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왜 생기는 지는 밝혀지지 않고 따라서 치유법도 없다. 아스피린과 에스트로겐이 발병 확률을 다소 낮춘다고 알려진 게 고작이다. 94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공개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이 부인 낸시 여사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이다. 낸시 여사는 며칠 전 자신도 알츠하이머병 환자라고 밝힌 배우 찰턴 헤스턴의 가족에게 "그 병의 잔인함을 너무 잘 안다. 아내 리디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병은 어느 것이나 무섭지만 알츠하이머병은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부인하게 된다는 점에서 더욱 끔찍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병의 치료법이 나와 치매에 시달리는 환자와 가족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기도한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