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학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남(白南) 김연준 재단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1939년에 한양대의 전신인 동아공과학원을 세웠다. 26세때였다. 재미 있는 대목은 그가 문과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연희전문에서 문과를 전공한 다음 일본으로 건너가 성악가인 현제명 김자경씨 등과 함께 음반을 냈다. 가곡 '청산에 살리라'를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38년에 서울 부민관에서 국내 첫 바리톤 독창회를 가졌다. 국내외 대학으로부터 문학 법학 음악부문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한국음악협회 명예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런 그가 공과대학 운영자가 된 데는 당시 국내상황이 결정적 역향을 미쳤다. 일본이 식민지 정책으로 농공병진을 본격화하면서 그는 공업학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덴마크 사회개혁가 E M 달가스에게 빠져들면서 마침내 '미국에 유학해 뛰어난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말았다. 학교 설립의 종잣돈은 유학을 위해 모은 3백원. 당시로서는 거금이었지만 이것만으론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함경도 명천의 거상이었던 아버지(김병완씨)로부터 한번에 5백원씩, 3천원 정도를 받았다. "도대체 얼마나 갖다 쓸 작정이냐"는 아버지의 성화에 "우리 집 재산의 절반은 써야 될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상과학교에 근무하던 김규삼, 일본 센다이제국대학 토목과를 졸업한 김해림 등과 학교 설립 문제를 협의했다. 일본인 당국자들을 설득하느라 고량주를 과음, 한동안 위장병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동아공과학원은 운현궁 맞은편 천도교 기념관 자리에서 첫 터를 잡았다. 47년 한양야간공업대학을 거쳐 이듬해 한양공과대학으로 태어났다. 53년 서울 수복후 현 위치로 옮겨왔다. 한양대 본관 건물 초석에는 그가 쓴 '愛之實踐(사랑의 실천)'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