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까지만 해도 명동은 문화예술의 메카로 불릴 만큼 자유혼이 넘치는 곳이었다.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명동은 일터이면서 쉼터이기도 했다. 예술지망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몰려 거리는 활기에 찼다. 다방 술집이 토론과 만남의 장소였다면 명동 한복판의 국립극장은 예술의 갈증을 풀어주는 공연장이었다. 공연장이 흔치 않았던 탓에 국립극장 무대는 언제나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얼마전 작고한 현인씨는 이 곳에서 '신라의 달밤'을 앙코르송으로 무려 9차례나 불렀고,'눈물 젖은 두만강'의 국민가수 김정구씨,'선창'의 고운봉씨,'알뜰한 당신'의 황금심씨 등 원로가수들의 공연은 항상 매진사례였다. 김희갑 구봉서씨 등 코미디언들이 정감 어린 웃음을 선사한 곳도 국립극장이었다. 한국 오페라의 대모로 불리는 김자경씨는 베르디의 가곡 '춘희'를 이 곳에서 초연했고,셰익스피어의 '햄릿''오셀로'등을 비롯한 수 많은 유명 작품들도 명동무대에 올려져 청춘남녀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김동원 최불암 김혜자 장민호 나옥주 백성희씨 등 스타배우들이 데뷔한 곳도 사실상 국립극장이었다. 정치적인 오욕의 흔적도 있다. 장면 전 부통령이 전당대회 도중 권총피격을 당했고,자유당 시절 정치깡패였던 유지광은 극장문지기를 맡아 이권을 챙기기도 했다.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던 명동 국립극장이 27년 만에 복원된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문화예술인들은 '옛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을 벌여왔는데,마침내 정부가 총 6백억원의 예산으로 이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을 한 후 7백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꾸며 오는 2005년에 재개관한다는 것이다. 바로크양식의 이 건물은 1934년 일본건축가 이시바시(石橋)가 영화관 건물로 지었으며 해방후엔 시(市)공관으로 사용되다 57년 국립극장으로 개명됐고,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에 세워지면서 75년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금)에 매각됐었다. 문화유산은 그 민족의 혼과 다름 아니다. 국립극장의 복원을 보며,이런 저런 구실로 멸실되어 가는 우리의 문화자산들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